얼마 전 미국에 갔다 왔다. 미국 대학에서 근무 중인 한국인 교수를 알고 있는데 그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그가 하는 수업까지 듣게 됐다. 재미교포 학생들 위주로 하는 수업이었다. 주제는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그의 설명과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러시아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디아스포라란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을 말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이 좋은 예다. 타지에 살면서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특징이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연구를 읽어 보면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에서 다른 나라로 이민간 사람들에게 디아스포라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흥미로운 일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러시아타운’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해외에 나가 있는 러시아 사람들은 서로를 피하면서 관계를 최대한 끊으려 한다. 대체 왜 그럴까.
얼마 전 러시아 민족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자와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재미있는 포인트를 지적했다. 디아스포라가 성공적으로 형성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동일한 국적이 아니라 동일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같은 국적을 갖고 한 나라에 살더라도 인종∙종교∙문화∙언어 등이 다르면 국내에서조차 뭉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해외에 나가면 같이 지낼 이유가 더욱더 줄어든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와 러시아 등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가 바로 이런 예에 해당한다. 이런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디아스포라는 인종이나 언어 등을 이유로 형성되는 것보다 사회신분이나 직업,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반면 한국이나 일본 같은 단일 민족 국가는 이 모든 요인들이 일치하기 때문에 같은 나라에서 온 것만으로 사람들이 보통 잘 뭉친다.
한국에는 한민족밖에 없다. 요새 들어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에 반해 러시아에는 190개가 넘는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즉 슬라브족 백인인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인구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러시아 사람이라고 하면 그리 쉽지 않다. 여권은 같지만 생김새는 물론 인종∙문화∙언어∙종교까지 많이 다르기에 러시아인 공동체가 생기는 것이 힘들다고 그 전문가는 설명했다. 한국 민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러시아 민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한국에 와 있는 러시아인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통계자료를 보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러시아 국적자는 1만5,000여명이라고 한다. 많은 러시아인이 한국에서 거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러시아 디아스포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국적은 러시아지만 인종이 다르거나 언어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특히 중앙 아시아 국가 출신자가 많다. 그래서 한국 내 직업이나 체류 등급도 모두 다르다. 상황이 이러니 러시아 국적자라고 해도 같이 어울려 지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울 명문대에 유학 온 학생들이 안산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잘 어울리지 않는 건 이해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러시아 학생들이 심지어 같은 도시 출신끼리도 서로 피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신기하게 보일 듯하다. 보통 해외 나가 있는 러시아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러시아 말을 듣거나 우연히 다른 러시아인을 만나게 되면 등 돌리고 러시아 말을 못하는 척하거나 서로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해외에 나간 한국 사람들이 한국말이 들리자마자 바로 말을 거는 것과는 정반대다. 러시아 사람인 나도 한국이나 해외에서 러시아 사람을 만나면 별로 관심을 주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는 습관이 있다. 반대로 해외에서 한국말이 들리면 괜히 반가운 마음에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넨다. 이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적기와 러시아 항공사 중에서 고를 일이 있으면 되도록 한국 항공사를 택한다.
해외 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본국 사회를 잘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의 특징은 해외 디아스포라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반면 사회 안에서 서로 관계가 그리 끈끈하지 않은 러시아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서도 같은 러시아인을 피하고 현지인과 최대한 어울리려고 많이 노력한다.
일리야 벨랴코프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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