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란 말이 있습니다. 명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청명한 하늘만큼은 매일 감동입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지와 친구들이 보내주는 사진들만 보아도 이 가을 풍광은 모두가 작품이더군요. 선뜻한 바람까지 느껴지니 세상에 행복이 따로 없다 싶었습니다. 거리 두기로 만들어진 여백들이 자연을 만나는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워 놓은 듯합니다.
제가 일하는 수목원엔 전통정원이 있습니다.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문화를 함께 만들고, 알리고자 만든 공간입니다. 우리의 전통정원의 특별함은 좋은 자연 속에 터를 잡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의 원리와 단순함의 미학들을 담아 만드는 데 있다 싶습니다. 왕들이 거닐던 궁궐 정원, 대표적으로 창덕궁 후원(한때 비원이라고 많이 불렀습니다)이 있는데, 원림을 만들고 방지와 누정이 자리 잡아 자연을 즐기는 일에서 나아가 그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수양하고자 했답니다. 선비들의 별서정원은 자연 경치를 그대로 빌려와 숲을 가다듬고 정자를 지었습니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세연정이 그 멋과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민가정원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민초들의 삶이 담긴 작은 공간, 장독대 옆, 담장 아래 자투리땅에도 꽃을 함께 심었던 정겨운 모습들을 만날 수 있어 절로 따뜻한 마음이 듭니다.
전통정원을 만들며 대표적인 경관을 상징하는 정자와 누각들도 만들었습니다. 궁궐정원에는 창덕궁 후원의 연꽃이 피어나는 부용지와 부용정, 이를 마주한 주합루와 화계(花階)를, 별서정원에는 소쇄원의 광풍각 등을 따라 만들었는데, 목재는 우리의 올곧은 춘양목을 쓰고, 양식과 크기는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아직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데 보기만 하여도 우리 문화의 단아함과 기품이 절로 느껴집니다. 이 주변에는 연못과 계류, 바람 소리를 느낄 수 있는 대나무숲, 탐스러운 작약원,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갈 매화길이 있고, 화계엔 양화소록에 담긴 풀과 나무들이 심어져 하나 하나 옛 선조들의 향기를 따라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정자와 누각에 현판을 다는데, 원래 그 장소의 그대로 주합루, 부용정, 광풍각이라고 해야 할까? 새로운 곳에 온 새로운 시대의 걸맞은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나? 여러 번의 전문가 조언을 포함한 의견들을 수렴한 결과, 우리의 전통정원은 문화재 복원이 아니며, 우리의 전통은 계승하지만, 미래를 지향하며 현재 한국정원(K-Garden)의 문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글도시 세종 가운데 자리 잡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가는 국립세종수목원에 걸맞게, 최고의 한국문화인 한글로 만들어진 누정의 이름은 소나무처럼 푸르고 옹골차다는 뜻의 '솔찬루', 세상의 중심이란 뜻의 '가온문', 탐스러운 결과를 얻는다는 곳이라는 의미의 '도담정', 함께 높이 난다는 뜻의 '하랑각'입니다. 영어이름의 아파트 숲 가운데서, 우리말 이름을 단 정원의 누정들이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한글날을 앞두고 수목원 산책길에서 하랑각 툇마루에 잠시 앉아 바람을 맞으며 이제 막 터를 잡아 자라기 시작한 풀과 나무를 바라보고, 이들을 잘 키워 아름다운 숲과 정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시고자 한글을 창제하신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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