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규모 채안펀드 논의에 증권사 반발
"시장원리 어긋나"… 당국 "자구 노력" 강조
코로나 때 도움 잊었나… 이기주의 비판도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경색이 심화하자 이른바 '제2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조성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50조 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대책을 내놓은 만큼, 최소한 금융권 차원의 자구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금융당국의 요구에 응한 셈이다. 다만 일부 증권사가 당국 요청을 외면하고 있어 실제 출범까지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1조 원 규모 '제2 채안펀드' 논의 시작
26일 금융당국·금융권에 따르면, 금융투자협회(금투협)는 24일 나재철 금투협 회장 주재로 '단기 자금시장 경색에 따른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참석자는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 △메리츠증권 △하나증권 △신한투자증권 △키움증권 등 9개사 대표이사(CEO)로 알려졌다.
'제2 채안펀드' 구성 방안이 회의 테이블에 올라왔다. 증권사들이 레고랜드 사태로 문제가 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자율적으로 사주자는 게 골자다. 중소형 증권사가 들고 있는 PF ABCP를 대형 증권사가 인수해 도미노 부실을 막자는 취지다. 첫 회의에선 주요 증권사가 각 1,000억 원 안팎을 모아 1조 원가량을 마련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다만 이날 오전 추가 실무자 회의에서는 출자 증권사를 확대하고, 금액을 낮추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진다.
증권업계의 반발은 논의 시작부터 불거졌다. 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중소형 증권사의 PF ABCP가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 회사가 리스크 관리에 실패한 것"이라며 "문제 있는 물건을 왜 우리가 사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 역시 "500억 원이든 1,000억 원이든 경쟁사를 도와준다고 하면 주주들이 수긍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위기 확산 막기 위해 시그널 줄 필요성"
당국은 부실 위험이 높은 PF ABCP까지 떠안으라는 취지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당국 관계자는 "특정 지원 형태나 자금 배분 등을 언급한 적이 없다"며 "정부 대응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우량 PF ABCP는 업계 스스로 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중소형 증권사의 PF ABCP 문제는 정부가 도와주겠지만, 시장 불안으로 멀쩡한 우량 PF ABCP가 외면받은 상황은 자구 노력으로 풀어달라는 얘기다. 정부는 이날부터 PF ABCP로 어려움을 겪는 증권사에 대해 3조 원의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대형 증권사들이 '내로남불' 행태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위기 때마다 당국에 지원을 요청했던 증권사들이 이제 와서 시장원리를 핑계로 당국의 요청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실제 2020년 3월 코로나19 위기 당시 대형 증권사들은 주가연계증권(ELS) 추가증거금(마진콜) 위기로 당국에 '살려달라'고 요청했고, 당시 당국·한은 등이 공급한 5조 원 이상 자금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개별 증권사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시장 실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며 "현시점에서는 위기 확산을 막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당국이 시장 기능이 잘 작동하도록 시그널을 줄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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