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김선욱과 서면으로 인터뷰한 적이 있다. 중구난방의 질문을 전달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렸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답이라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절제된 어조였지만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고, 본능적이라 스스로를 평가하는데도 논리와 분석이 살아 있었다. 문장에 배여있는 삶과 음악에 관한 뚜렷한 통찰이 그 이후 김선욱의 연주를 달리 마주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성료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 음악가로 활약했던 김선욱은 2개의 중요한 협연 무대에 올랐다. 탄생 150주년을 맞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Rachmaninoff)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죄르지 리게티(G.Ligeti)의 피아노 협주곡은 현대 창작음악 연주의 새로운 모델을 개척해온 앙상블 모데른(Ensemble Modern)과 합을 맞췄다. 이처럼 어떤 작곡가의 탄생을 기리는 경우, 연주자들은 의식적으로 기존 해석의 고리타분한 답습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특히 4월 1일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가 그러했다. 초연 이후 수만 번 무대에 오르며 영웅이 되길 원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쇼 피스로 사랑받아 온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김선욱은 새롭고도 독창적인 해석으로 청중의 무딘 청력을 신선하게 자극했다.
여느 피아니스트처럼 김선욱도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접했겠지만, 연주자의 다양한 무대 경험은 일회성으로 휘발되지 않는다. 대신 연주자 내면의 사고와 이해의 폭을 확장시키기 마련이다. 김선욱은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한편으론 과감한 시도를 다른 한편으론 관조적인 접근을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그사이 균형을 찾는 것이 연주자의 중요한 역량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곡이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연주할 리 없다. 예전엔 연주의 객관성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며 주관적인 관점을 존중하는 김선욱은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매번 똑같은 정형화된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순간순간 표현하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라고 얘기한다.
4월 6일 김선욱이 앙상블 모데른과 협연했던 죄르지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은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성을 갖는 동시에 '컴플렉서티(complexity)가 많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김선욱의 음악적 선호도가 십분 반영됐던 무대였다. 김선욱은 레퍼토리 선정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선택과 집중이 뚜렷해졌습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음악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는 거죠. 청중에게 쉽게 다가갈 곡들을 억지로 끼워 넣기 보단 '이기적인 프로그램'을 고수하고 싶어집니다."
리게티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에 비하면 무대 위 임상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웬만한 피아니스트가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고 복잡한데 그래서 참신하고 찬란한 악상이 만발한다. 숱한 피아니스트들이 악보를 익히는 독보 과정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했겠지만, 바로 그 면에서 악보에 기반한 김선욱 특유의 심도 있는 연구가 전적으로 큰 힘을 발휘했다. "작곡가의 기보법을 세심히 파악한 후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는 김선욱의 리게티 해석은 앙상블 모데른과 밀도 깊은 협업으로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11년 만이었다. 김선욱은 2012년 통영국제음악제의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활약한 이래 다시 이 음악제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어느새 한국을 이끌어가는 중견의 음악가로 성장했으니 깊이와 연륜이 깃든 음악세계를 통영의 청중들도 뿌듯하게 확인했을 것이다. 김선욱은 "음악가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은 음악 그 자체"라 이야기한다. "삶을 다하는 때까지 연주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란 김선욱의 헌신이 이번 통영음악제에서 깊은 울림으로 오래도록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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