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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공무원의 만취 운전이 부른 '스쿨존 참극'

입력
2024.09.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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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보호구역. 이한호 기자

어린이보호구역. 이한호 기자

'초등학교나 유치원 정문에서 반경 300m 이내 주통학로 지역. 안전표지판·속도측정기·신호기 설치. 자동차의 정차나 주차를 금지하고, 운행속도를 30㎞ 이내로 제한…'

1995년 도로교통법에 도입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대다수 운전자는 조심 또 조심한다. 안타까운 사고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법이 강화되고, 시민들의 경각심도 높아져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운전자가 사라지지 않아 스쿨존에서의 참극은 반복되고 있다. 2019년 스쿨존 횡단보도를 건너다 변을 당한 김민식군 사건을 계기로 처벌 수위를 대폭 높인 이른바 민식이법(스쿨존에서 어린이 상해 및 사망사고를 냈을 때 성립하는 범죄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규정)까지 만들어졌지만, 스쿨존 내 음주운전으로 어린이가 사망한 사건도 벌어졌다.

귀가 길 인도 덮친 차량에 참변

지난해 4월 8일 오후 2시 21분 대전 서구 둔산동. 배승아(당시 9세)양은 평소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과 집 근처 생활용품점에 들렀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수다를 떨며 걷던 그때, 갑자기 흰색 구형 SM5 승용차 한 대가 좌회전을 한 뒤 중앙선과 도로 경계석을 넘어 배양과 일행이 걷던 인도로 돌진했다. 사고가 난 곳은 문정초등학교와 탄방중학교, 충남고등학교 등 3개 학교가 서로 담장과 도로를 맞대고 있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으로, 좌회전 금지구역이었다.

지난해 4월 스쿨존 인도를 가다 만취한 퇴직 공무원의 차량에 희생된 배승아양. 유족 제공. 연합뉴스

지난해 4월 스쿨존 인도를 가다 만취한 퇴직 공무원의 차량에 희생된 배승아양. 유족 제공. 연합뉴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고로 심정지 상태에 놓인 배양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성인 투여량의 2배에 달하는 많은 약물을 투여해 심장이 잠시 뛰었지만, 사고 11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9시쯤 배양은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배양과 함께 있다 차에 치인 어린이 3명 중 1명은 뇌수술을 받는 등 크게 다쳐 병원치료를 받았다. 당시 친구가 목숨을 잃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생존 피해자들은 "그날 거기에 가지 말자고 해야 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등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

배승아(9)양이 숨진 대전 서구 어린이보호구역 인도에 배양을 추모하는 꽃과 인형, 편지들이 놓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승아(9)양이 숨진 대전 서구 어린이보호구역 인도에 배양을 추모하는 꽃과 인형, 편지들이 놓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취한 퇴직 공무원... 사고 낸 뒤에도 '비틀비틀'

사고를 낸 운전자는 수년 전 퇴직한 전 충남도청 공무원 방모(67)씨였다. 방씨는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0.108%의 만취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았다. 면허 취소 기준(0.08%)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당시 차량 속도도 스쿨존 법정 제한 속도(시속 30㎞)를 훌쩍 넘어선 시속 42㎞였다. 방씨는 사고 직후 시민들이 달려와 보호조치를 하는 와중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시민 신고로 현장에서 체포된 방씨는 경찰에 "지인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소주를 반 병 정도 마셨다"고 진술했다. 경찰조사 결과 방씨는 이날 오후 12시 30분쯤 대전 중구 태평동 한 노인복지관 구내식당에서 함께 근무했던 퇴직공무원 등 8명과 소주와 맥주 등 13병을 나눠 마신 뒤 운전대를 잡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고 전 촬영된 해당 식당의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방씨가 술을 마신 뒤 운전하기 전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상을 보면 방씨는 식당에서 나올 때부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비틀거리면서 방씨가 운전석에 올라탄 그의 차량은 운행을 하자마자 한 차례 급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만취상태로 운전대를 잡은 방씨는 사고지점까지 5.3㎞가량을 운전했다.

대전 둔산동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 배승아(9)양을 숨지게 하고, 초등생 3명을 다치게 한 방모(67)씨가 검은색 계열 모자와 흰색 마스크를 쓴 채 대전둔산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전 둔산동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 배승아(9)양을 숨지게 하고, 초등생 3명을 다치게 한 방모(67)씨가 검은색 계열 모자와 흰색 마스크를 쓴 채 대전둔산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방씨가 저지른 '스쿨존 참극'은 그의 위험한 음주운전 습관이 부른 사고였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방씨는 현직이었던 1996년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도 그는 툭하면 음주운전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방씨는 조사 과정에서 "평소 술을 1~2잔만 마시고 운전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유족 '악어의 눈물' 호소했지만 징역 12년 확정

검찰은 위험운전치사상죄와 어린이보호구역치사상죄,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방씨를 구속기소하고,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거나 눈이 머는 것에 비유하지만 숨진 피해 아동의 유족은 더 깊은 고통이었을 것"이라며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배양의 유족은 1심 과정에서 "방씨가 하는 반성은 감형받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라며 "사고 직후 사과를 하지 않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자신의 살길을 찾았다는 것에 분노한다. 사죄 없는 반성문 제출은 유족을 향한 2차 가해"라고 울분을 쏟아냈다.

사건을 살핀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0월 "피고인은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운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했고, 사고가 난 것도 인식하지 못해 주변 시민의 도움으로 구호조치가 이뤄졌으나 한 명은 숨지고 나머지 피해자들도 중대한 상해를 입었다"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가족들이 현재까지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아파트를 처분하는 등 피해 회복 노력을 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사유를 설명했다.

대전지법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전지법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양의 유족은 지난해 12월 방송된 JTBC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에 출연해 "1심 판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족은 "최후 변론에서 (방씨는)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며 "판결문에는 (방씨가) '반성하고 있다', '피해 회복을 위해 주택을 처분했다', '공직 생활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게 왜 감형 사유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어 "상습 음주운전자임에도 무기징역이 선고되지 않았는데 어떤 경우에 무기징역이 선고되는지 의문"이라며 "검찰 측에 더 강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의견을 표했다"고 했다.

이에 검찰은 "사망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피해자들도 PTSD를 겪고, 정신과 치료를 받을 만큼 피해가 커 양형이 부당하다"고 항소했다. 반면, 방씨는 항소를 포기했다.

하지만 항소심 결과는 1심과 마찬가지였다. 올해 4월 2심 재판부는 "피해자 가족들이 현재까지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점과 피고인이 아파트를 처분하는 등 피해 회복 노력을 한 점을 모두 고려했다"며 원심과 같은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검찰과 방씨 양측 모두 상고를 포기해 징역 12년 형이 확정됐다.

스쿨존 사고 계속되는데...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

스쿨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민식이법'으로 처벌받은 운전자 10명 중 9명은 벌금형이나 집행유예 등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민식이법을 대표발의한 강훈식(3선·아산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2021년 3월~2024년 4월 민식이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1심 판결을 분석한 결과 전체 373건 중 329건(88.2%)에 벌금형 또는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벌금형이 158건으로 전체의 42.4%를 차지해 가장 많았으며, 집행유예 154건, 무죄 19건, 벌금형 집행유예 17건, 선고유예 3건, 공소기각 1건이었다.

강 의원은 "아이들을 길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에 적절한 처벌 수위인지 의문"이라며 "어린이보호구역 내에서의 어린이 치사상에 대한 양형 기준이 작년 7월부터 적용된 만큼 감경 및 가중 처벌 여부를 꼼꼼히 따져 국민이 납득할 만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두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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