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연예인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젊은 여성을 비하하는 말, ‘빠순이’. 그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지난 주말 제대로 보여줬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집회를 색색의 아이돌 응원봉으로 물들였다. 계엄으로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대통령에게 응원봉으로 맞섰다. 사랑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했던가. ‘소중한 내 가수’를 지켜 본 실전경험으로 ‘소중한 내 나라, 내 일상’ 지키기에 나섰다.
□ 1세대 아이돌그룹 H.O.T.와 젝스키스가 활약한 1990년대의 가수 응원아이템은 풍선이었다. 2000년대 초 플라스틱 야광봉 시대를 잠깐 거쳐 2008년 조명이 들어오는 지금 형태의 응원봉이 처음 등장했다. 빅뱅이 시초였다. 아이돌 시대가 만개하며 응원봉은 K팝 문화의 상징이자 각 팬덤의 정체성이 됐다. 기술 발전으로 발광력도 진화했다. 탄핵집회 야간 항공사진에서 응원봉 불빛이 색칠한 듯 선명하게 보이는 건 그래서다. K팝 소속사들의 상술 탓에 가격도 올랐다. 요즘은 5만 원 안팎인데, 수시로 새 버전을 출시해 지갑을 열게 만든다.
□ 생김새는 귀엽지만 응원봉을 흔드는 마음은 때로 비장하다. ‘내 가수’가 욕을 먹을 때, 소속사가 돈만 밝힐 때, 팬심이 업신여김 당할 때 팬들은 응원봉을 켜고 팔이 빠져라 함께 흔든다. 그럴 때 응원봉은 연대해서 싸우는 힘이다. 탄핵집회장을 밝힌 무수한 응원봉은 거대한 분노였다. 2030세대 여성들이 가장 많이 나온 건 그들의 분노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윤 대통령을 그들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보관케이스를 따로 구입해 모셔 둘 정도로 응원봉은 K팝 팬들에게 귀한 존재다. “가진 것 중에 가장 빛나고 꺼지지 않는 것”이라서 응원봉을 탄핵집회에 들고 나온 거라는 ‘X’(옛 트위터) 글이 수만 번 공유됐다. 응원봉은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다. 샤이니 팬인 지인은 “제일 오래 간다는 브랜드의 건전지를 사서 넣었다”고 했다. 중고매매 온라인 장터마다 응원봉 구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SNS엔 조용필 응원봉, 나훈아 응원봉을 서랍에서 찾아냈다는 중장년층의 글이 올라온다. 응원봉은 포기하지 않는 힘이다. 응원봉이 민주주의를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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