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기생충'(2019)은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CJ ENM의 주요 업적 중 하나다. CJ ENM 제공
1994년 10월 할리우드는 떠들썩했다. SKG라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SKG는 스티븐 스필버그(S)와 제프리 카젠버그(K), 데이비드 게펜(G)이 힘을 합쳐 설립한 회사였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분야에서 각각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이들이 손을 잡았으니 ‘태풍의 눈’이었다.
세 설립자는 각자 1억 달러씩을 자본금으로 냈다. 1995년 추가 동업자를 모집했는데 미국 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대기업들이 움직였다.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이 뛴다는 말이 들렸다. 승자는 의외였다.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오래전부터 인맥을 넓혀온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활약이 주효했다. 그해 제일제당에 영화사업부가 설립됐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CJ ENM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초 한국은 문화 팽창기에 있었다. X세대로 불리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콘텐츠 구매를 위해 지갑을 기꺼이 열었다. 유명 가수들이 음반 100만 장 이상을 팔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케이블TV가 방송을 시작했다. 여러 커뮤니티들이 PC통신에 진을 치고 콘텐츠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경제는 호황이었다. 여가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팽배했다. SM엔터테인먼트가 1995년 설립된 건 우연이 아니다.
SKG와 손을 잡은 건 당시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기도 했다. 개척자의 길이 평탄할 리 없다. 한국 영화는 산업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영세했다. 영화마다 실제 관객이 얼마나 드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멀티플렉스는 생소한 단어였다.
돌이켜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30년이 흘러 여러 일들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콘텐츠가 동아시아에서 한류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K콘텐츠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가 들어섰고, 관객 1,000만 명 이상을 모은 영화들이 잇달았다. 영화 ‘기생충’은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에 올랐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CJ ENM 홀로 이룩한 성과는 아니나 CJ ENM이 없었다면 세우기 쉽지 않았을 이정표들이다. 요컨대 CJ ENM은 국내 콘텐츠 업계의 ‘퍼스트 펭귄’이었다.
국내 영화와 드라마가 혹한에 시달리고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득세로 플랫폼 환경은 바뀌었다. 예전 방식대로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30년 전 시작된 한국 콘텐츠 혁명은 이제 효용성을 다했다. 비전을 갖춘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때다. CJ ENM은 새로운 30년을 위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콘텐츠 선구자가 나서 과감하게 ‘찬물’에 뛰어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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