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서 全, 잔인한 노동현실 바꾸기 위해
"근로기준법 준수"외치며 분신
후미진 곳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오토바이에 둘러싸여 외면 받아
판지촌 허물고 지은 평화시장 동대문 의류상권의 모태이자 한국 경제 압축 성장을 대변
노동력 착취하는 사회구조는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금요일. 북서풍에 다소 구름. 기온은 2~8도. 늦가을이라기엔 유난히 쌀쌀한 날씨였다. 아침 신문에는 프랑스 드골 장군의 장례식 소식이 큼지막하게 실렸고 인천 시내 쌀값이 한 가마에 8,000원 선을 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연인들은 아마도 그 주말에 개봉하는 윤정희 주연의 두 영화 ‘여인전장’ ‘명동노신사’나 남궁원 주연의 ‘암흑가의 25시’를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으리라. 라디오로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와 배호의 ‘막차로 떠난 여인’ 같은 유행가를 들으면서.
이날 오후 서울 을지로 6가의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은 드골 장군과 윤정희, 김추자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시위를 하는 노동자 500여명을 막기 위해 경찰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시장 건물 밖으로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나오는 젊은이가 보인다. 몇 발자국 내디딘 그의 옷 위로 불길이 치솟고 순식간에 전신을 휩싼다. 그가 절규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입 속으로, 코와 귀 속으로 화염이 파고든다. 알아듣기 힘든 몇 마디를 더 외친 뒤 그가 쓰러진다. 모두들 당황한 나머지 불을 끌 엄두를 못 내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청년의 지인이 외투를 벗어 불길을 끈다. 까맣게 타버린 청년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외친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기자들이 다가가 뭔가를 묻지만 까맣게 타버린 입으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경찰에게 빼앗긴 플래카드 대신 노동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이어간다. 하지만 기동경찰의 곤봉에 얻어 맞고 구둣발에 짓밟힌 채 개처럼 경찰서로 끌려갈 뿐이다. 병원에 실려간 청년은 이날 밤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눈을 감는다. 44년 전 전태일(1948~1970) 열사에게 일어난 일이다.
▦동대문, 압축 성장의 상징
“전태일 동상을 그렇게 해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뜻을 기리려면 어디 좀 깨끗하고 한갓진 데 세워야 경건한 마음으로 들여다 볼 거 아냐. 여긴 주차장도 없는데 그런 데다 세워놓으니까 오토바이들에 둘러싸여선… 쯧쯧.”
11월의 어느 평일 오후 평화시장 앞을 지나가는 무수한 행인들 중 전태일 동상에 눈길 주는 이 한 명 찾을 수 없었다. 일렬로 늘어선 오토바이에 막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평화시장 2층에서 만난 가게 주인 말처럼 동상이 딱해 보였다.
동대문 일대를 둘러싼 에너지는 밤에 폭발한다. 지방에서 상인들이 몰려 오는 밤과 새벽에 더 북적거린다. 이른 낮에 찾아간 평화시장 주변은 한산한 편이었다. 1층의 한 가게 주인이 “물건은 안 사고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했다. 2층엔 손님이 꽤 있었다.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옷도 50대 이상을 겨냥한 게 많았다. 인근 쇼핑몰에 비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도매 중심의 3층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3층에서 만난 한 60대 상인이 말했다. “40여 년 했지. 돈은 못 벌었어도 오래 했어. 70년대엔 손님이 많았는데 지금은 통 없어. 나 처음 왔을 땐 하루만 장사 해도 집 한 채 산다고 말할 정도였지. 중국 물건이 들어오면서 노인네 시장이 돼서 팍 죽어버렸어. 여긴 도매만 하니까 밤장사만 해.”
서울 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쪽으로 약 600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 3층 건물. 1961년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을 허물고 지은 평화시장은 동대문 일대에 형성된 대규모 의류 상권의 모태이자 유신시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을 대변하는 장소다. 6ㆍ25전쟁 이후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판자촌에서 재봉틀 한두 대로 옷을 만들어 팔던 것에서 출발해 전국 의류 소매상들이 모이는 대규모 도매시장이 됐다. 2, 3층에 자리잡은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1층에서 판매되는 식이었다. 1968년 들어선 통일상가와 1969년 지어진 동화시장까지 3개 시장에서 나온 옷들이 1970년 당시 전국 기성복 수요의 약 70%를 차지했다. 3개 시장 일대의 사업주들은 대부분 영세업자들이었지만 넘쳐나는 수요 덕에 금세 부자가 됐다. 지금처럼 과잉 공급이 없어 만드는 대로 다 팔리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후반 봉제공장 800여 개가 밀집해 있던 평화시장엔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농촌 출신의 14~24세 여성들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미래를 꿈꿔야 할 10대 중반의 나이에 환기장치 하나 없고 햇빛조차 들지 않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하루에 14시간 이상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했다. 2,000명이 화장실 3개를 함께 사용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평당 4명 정도의 노동자가 원단 더미에서 나오는 포르말린 냄새와 옷감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먼지를 마셔가며 눈앞에 켜 있는 백열전등에 눈이 충혈된 채 일해야 했다. 좁은 작업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만든 다락방 때문에 작업장에선 허리도 펴지 못하고 걸었다. 가축보다 못한 처지였다.
전태일이 산화한 뒤 다락방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평화시장에서 인근 시장으로 또는 주택가로 옮겨가는 공장이 늘어났다. 1980년대 중반쯤엔 평화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이젠 그런 공장들도 중국산 제품에 밀려 대부분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 전태일과 비슷한 시기에 일했던 노동자가 지금 평화시장에 남아 있을까. 나이 지긋한 상인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전태일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66세. 운 좋게 전태일이 살아 있던 때부터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상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땐 사업하는 사람도 무식하니까 종업원들 막 부리고 다 그랬지. 우린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 먹고 살기 힘들었으니까 거기 매달렸지. 전태일은 조금 나은 사람이었던 거고. 그 사건을 직접 보진 못했어. 그러고 나서 뭐가 달라졌는지도 잘 모르겠고. 당시엔 관심이 없었지. 바쁘니까. 지금처럼 TV가 있던 것도 아니고 뉴스 같은 건 들을 생각도 못했어.”
현재진행형의 전태일
전태일은 1964년 봄 16세의 나이에 평화시장 안에 있는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해 재단사로 일했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되기 전 5년 경력의 재단사인데도 고작 2만3,000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래도 10대 소녀들이 대부분인 미싱사 ‘시다’(보조)에 비하면 꽤 많은 금액이었다. 그들의 월급은 1,800원에서 3,000원 정도. 참으로 파렴치한 임금이다.
그보다 심각한 건 노동시간이었다. 전태일과 동료들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20명이 하루 14~16시간 노동을 하고 있고 96명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환에 걸려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휴일은 한 달에 단 이틀. 1967년 3월 17일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일하던 중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젊은 여성 노동자의 죽음을 접한 뒤 충격에 빠진 그는 노동자를 쓰레기처럼 대하는 잔인한 노동 현실을 바꿔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근로조건 개선을 목표로 한 재단사들의 모임부터 만들었다. 이름은 바보회. 업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온 바보라는 걸 철저히 깨달아야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다. 업주들이 이들을 내버려뒀을 리 없다. 전태일은 해고됐다. 전태일과 노동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바라며 정부에 탄원서를 10여 차례 내고 언론에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위는 경찰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됐다. 절망의 끝에서 전태일은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남겨주기 위해 천금보다 소중한 목숨을 불태우기로 했다.
그로부터 44년 뒤,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기계 취급하는 사회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보라. 서울시청과 광화문 주변을 잠깐만 걸어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전태일의 희생이 불 붙인 노동운동은 세기를 건너 뛴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86년 서울 독산동의 신흥정밀에 다니던 노동자 박영진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를 철회하라, 노동3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조원이던 배달호는 사측의 살인적인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에 항의하며 몸에 기름을 붓고 불 붙여 숨졌다.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도 그 해 노동탄압과 무자비한 가압류에 항의하며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지 129일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태일은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전태일재단은 13일 공원 내 전태일 열사 묘소 앞에서 44주기 추도식을 열 계획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도 평화시장 앞에서 동대문을 오가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매일매일 신음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노동자의 절규를 들으며. 노동자 탄압의 끈질기고 잔인한 역사가 엄혹한 현실로 우리 앞에 서 있는데도 세상은 무관심하다. 결단을 내린 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연다혜 인턴기자(경희대 언론정보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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