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4월이 되면 엘리엇의 장편시 ‘황무지’의 앞 구절이 회자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주었다.”
황무지는 기술문명에 갇힌 인간성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 또한 잔인하다. 그러나 그런 죽음과 절망조차 이겨내는 라일락의 소생과 마른 구근의 부활은 그래서 그냥 잔인한 게 아니라 ‘가장 잔인한(the cruelest)’ 4월의 고백이다.
4월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크고 핵심적인 전례인 부활절이 주로 있는 달이다. 부활은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 죽음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 죽음이 꼭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탐욕을 죽이고 오만을 죽이며 비인격성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죽음을 외면하고 부활만 바라보는 것은 맹신이며 무지일 뿐이다.
4월은 다시 우리에게 잔인할 수밖에 없다. 지워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는 수백 명의 생명을 안고 물에 잠겼다. 그것은 자본의 탐욕과 정치의 무능이 빚어낸 재앙이고, 무엇보다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을 수수방관하고 수장시킨 부끄러운 시대의 민낯이었다. 대통령은 7시간이나 부재 상태였으며 정부는 갈팡질팡 헛짓만 했다. 온 국민은 TV로 물에 잠긴, 그러나 아직은 일부가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다. 그 안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 자식과 가족을 둔 뭍의 가족들의 심정을 우리는 결코 온전히 헤아릴 순 없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기자회견에서 억지 눈물을 짜낸 대통령은 약속과 달리 유가족이 얼씬도 못하게 외면했고, 자칭 보수와 애국을 부르짖는 자들은 단식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조롱하는 파렴치를 태연하게 보여줬다. 여전히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차가운 물속에 잠긴 원통한 영혼은 짐짓 모른 척하며 심지어 그저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짓뭉개거나,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살아나지 못한다느니 이쯤에서 그만 접자느니 하는 무례와 야만으로 시간만 허송했다. 자신의 가족이 그 상태에 있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국가와 정부를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서 정부는 조사의 대상이지 조사의 주체가 아니다!
봄이다. 얼어붙은 땅 속에서 숨 고르고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웅크리며 겨울을 버틴 꽃들이 부활하는 봄이다.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이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런 극적인 부활의 상징을 체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1년 내내 무기력과 무능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정부가 4월 선거를 앞두고 세월호를 인양할 수도 있다는, 그나마도 온갖 변명의 조건을 내걸고 신호를 보내며 여론을 떠본다. 비통한 심장을 안고 겨우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내리꽂는 잔인하고 몰상식한 이들에게도 봄은 똑같이 찾아온다. 과연 그들의 봄은 어떨지 궁금할 뿐이다.
엘리엇이 이 장면을 봤다면 뭐라 했을까?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봄이라고 하지 않을까? 죽음의 땅에서 다시 생명을 토해내는 4월의 부활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엘리엇조차 지금 우리의 세태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 야만을 죽이고 ‘살림과 사랑’으로 죽은 우리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런 봄이고 그런 4월이다. 그러나 우리가 봄을 맞을 자격은 과연 있는지 두렵기만 하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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