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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내 인생 마지막 주례 이야기

입력
2015.05.3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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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주례를 서주시면 저희가 진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주례라니! 결혼식장 단상 앞에서 근엄하고 경건한 ‘자세’로 검은 머리 파뿌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바로 그 주례? 나 보고 그걸 해 달라고? 난데없이 귓속으로 파고든 그의 요청은 진도 8.5의 강진으로 변해 나의 심장을 마구 흔들어댔다. 등줄기가 뻣뻣해지면서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 심각한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하면서 나는 최대한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간절히(?)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뿔테안경 너머 완곡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은 평소 진지하기 그지없는 원래 그의 표정과 더불어 거절의 도리질이 쉽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직감으로 이어졌다.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는 이 친구가 과연 제정신인가. 마흔 일곱 살이던 지난해 가을에 결혼해 이제 겨우 7개월짜리에 불과한 ‘늙은’ 새내기 신랑인 내가 주례를 서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말이다. 무엇보다 그 단상에 올라서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은가. 아니!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 ‘소년’을 가슴에 품고 있는 젊디젊은(젊고 싶은) 청년이라 스스로 자부하고 있지 아니한가?

멍하니 부질없는 상상만 하던 나는 승낙으로 알고 돌아간다는 그의 또 다른 ‘선포’가 메아리가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약속은 이미 했다고 하니 아무튼 지켜야만 했다. 사회적 경험이든 관록이든 무엇 하나 여물지 못한 내가 결혼의 참 의미를 깊이 이해하면서 그 길에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례’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지금은 말끔히 나았지만 한 때 건강을 잃을 만큼 몸이 안 좋았던 그였기에 나는 더더욱 진심을 담아 축하의 꽃다발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왕 하는 주례, 어설픈 덕담이나 지루한 훈계조의 글을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후 아내가 될 아름다운 여인을 ‘모시고’ 나온 그와 다시 만난 날, 나는 일부러 두 사람에게 많은 것을 묻고 들었다. 첫 소개팅 날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는 두 사람의 얘기는 귀를 촉촉하게 다독였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절로 내 눈앞에 펼쳐졌다.

서로에 대한 바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내 될 사람은 가끔은 요리나 청소를 해주면 기쁠 것 같다며 종종 야외나들이도 하면서 지금처럼 자상한 모습으로 남아주길 원했고, 무엇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남편이 될 사람은, 둘이 함께라면 햄버거 하나에도 문득,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며 이제 매일 아침식사를 같이하게 되어 기쁘다고, 그리고 여린 마음 잘 추슬러 더 단단해지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대 닮은 예쁜 딸 하나 꼭 부탁한다는 말을 쑥스러운 웃음과 섞어 남겨 주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소박한 일상의 소망을 메모하면서, 나는 두 사람이 어떤 인연이었는지, 그리고 이제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는지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를 살피는 ‘닭살’의 기운을 충분히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례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깊을 대로 깊어진 신뢰와 사랑의 폭이 이렇게 있는데 이거저것 잘 하라는 충고 형식의 전언 따위는 큰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서로 ‘나누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둘이 ‘하나’가 되는 길 위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채워가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두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다가왔다. 나는 결혼 이후 처음 꺼낸 양복을 입고는 왜 이리 옷이 줄어들었을까(?) 투덜거리며 떨리는 마음으로 서울 시내의 한 예식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소 젊은(?) 주례선생의 출현에 양가 부모님이나 예식장 직원들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상황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흰 장갑과 꽃송이로 무장한 나 역시 모든 하객을 대신해 축하의 마음을 전하는 주례선생으로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당당하게(?) 단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윽고 떨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준비한 주례사를 천천히 낭독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전하는 귀한 순간이었고,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을 대신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신부의 얼굴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 역시 눈물이 찔끔 했지만 주례선생이 질질 눈물을 흘리는 ‘추태’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손가락을 꺾어가며 겨우 참아냈다. 주례사의 마지막은 둘이 서로 한결 같은 사랑을 채워나가길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모든 순서가 끝나고, 신랑 신부가 행진하는 모습을 단상 위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많은 하객들의 환호 속에 새로운 인생항로에 들어 선 두 사람을 보면서 나 역시 아낌없이 축하의 박수를 건넨 뒤, 나는 겨우 단상에서 내려 올 수 있었다. 온몸은 더위가 아닌 호흡곤란 증세에 의한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다시는 서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며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주례는 끝이 났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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