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자본주의에 종속되지 않는 프리마켓 표방한 '야미이치'
서울서도 이달 29일에 처음 열려, 다양한 분야 창작자들 협업 움직임
감시·억압으로 손상된 인터넷 환경 재기발랄한 문제제기
접속 넘어 접촉하고 연대 시도
인터넷의 역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선택지를 일깨운다. “넷은 검열을 손상으로 해석하고 이를 우회하는 경로를 만들어 낸다.” 미국 전자프런티어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의 공동 설립자인 존 길모어가 1990년대 초에 했던 이 말도 인터넷이 본래 무엇이었던가를 증언하고 있다. 인터넷 대중화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인터넷은 관리 기능의 분산, 다원 접속, 무정부적 구조를 지향했다.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전통적 인터넷 기술인 이메일, 인터넷중계채팅(IRC), 유즈넷(Usenet) 역시 동등 계층간 통신망(peer-to-peer network) 형식으로 운영됐다. 사용자들 간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능력이야말로 이 시기 인터넷의 혁명적 가능성이었다.
인터넷의 상업화가 가속되고 서버-클라이언트 위상 구조에 기초한 경제 영역의 규모가 극단적으로 확장되면서, 소통과 공유를 중시했던 초기 인터넷의 철학은 배반당했다. 지금의 인터넷과 컴퓨팅 기계들은 가능한 능력이 아니라 허용된 능력의 차트에 갇혀 있다. 이것은 기술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가능한 행동 능력의 범위도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속하는 인터넷은 거대 통신사 서버에 갇힌 가두리 양식장이나 다름없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선 사회에 대한 불평 불만을 비교적 자유롭게 쏟아낼 수 있다고 믿지만, 이조차 기업이 만든 대중 통제 시스템에 불과하다. 국정원 해킹 사건도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일이었다. 인터넷 시스템 전체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자유로운 정보 환경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뀐다거나 업계의 주도권이 변한다 해도 감시와 통제의 주체가 바뀔 뿐이다.
온라인에만 의지해선 빼앗긴 자유를 되찾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난 아랍의 봄에서 배운 2010년대의 교훈이기도 하다. 2011년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서비스를 차단하기만 하면 반정부 소요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식을 얻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고, 입에서 입으로 집회 일정을 공유하며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인터넷 블랙아웃 사태가 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다. 국가 권력과 시장 논리에 구속된 인터넷이 자유를 되찾기 위해선 지금의 인터넷에 결핍된 것들을 되찾으려는 활동 영역을 오프라인으로 넓혀야 한다. 접속을 넘어 접촉하고 연대해야 한다.
혁명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이런 방식도 있다. 일본의 뉴미디어 아티스트 ‘엑소니모(exonemo)’가 주축이 된 IDPW라는 조직이 2012년부터 시작한 블랙마켓을 소개한다. ‘인터넷 야미이치(Internet Yami-Ichi)’(이하 야미이치)라는 행사다. 8월 29일 서울에서도 처음 열릴 예정이다. 야미이치를 조직한 IDPW는 ‘100년 전부터 계속된 비밀결사’라는 컨셉으로 운영된다. 진짜로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직은 아니다. 인터넷이 사람들의 의식에서 해와 달, 공기처럼 자연화된 것에 대한 풍자를 담은 표현이다. 인터넷이 100년쯤 되었다고 느낀다면 나쁜 인터넷에 맞서는 비밀결사도 그만한 존재감을 지녀야 한다는 배짱이 대단하다.
야미이치는 프로그래머의 자존심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엑소니모가 제작한 어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 APP가 판매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애플 앱스토어 등록이 거부되자, 비슷한 일을 당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애플과 구글이 장악한 온라인 플랫폼 시장에 종속되지 않는 프리마켓을 준비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것이 IDPW의 결성이다. IDPW라는 이름은 ID와 PW(비밀번호)만 있으면 언제든지 누구라도 접속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야미이치의 출발점은 유즈넷 시대의 ‘백본 음모단 분쇄(Breaking of the Backbone Cabal)’ 사건과 비교할 만하다. 규획된 체계 안에서만 인터넷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인터넷이 아니라고 믿었던 프로그래머들의 싸움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유즈넷은 지금의 블로그만큼 인터넷의 대세를 이뤘다. 유즈넷은 일종의 전자게시판이다. 특정한 주제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게시하거나 관련 분야에 대한 그림, 동영상, 실행파일, 데이터파일 등의 자료를 등록할 수 있는 토론 시스템이었다. 79년부터 시작된 이 시스템은 아르파넷이라는 막강한 컴퓨터 자원에 연결된 버클리대가 81년에 참여하면서 비약적 발전이 가능했다.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기 전인 이 무렵만 해도 인터넷의 용도는 정보 자원의 적절한 공유와 협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유즈넷의 전송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아르파넷의 트래픽을 압도했다. 이대로는 시스템이 유지되지 못하고 ‘인터넷의 죽음(imminent death of the Net)’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유즈넷 뉴스의 재전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뉴스그룹 구성의 민주화가 필요한 시점에 ‘백본 음모단’이 역할을 맡았다. 유즈넷의 ‘백본(Backbone)’이란 호스트 컴퓨터 관리자들의 동의 하에 상호 연결된 컴퓨터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유즈넷 전체의 트래픽 전송을 담당하는 체계이기도 했다. 백본이 없으면 뉴스(메시지)는 송신이 지연되거나 송신되기 전에 삭제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한정된 컴퓨터 자원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대책이기도 했다.
유즈넷에 7개의 새로운 분류체계를 마련한 백본 음모단은 대개 20~30대 남성 컴퓨터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인터넷이 고상한 성지처럼 운영되길 바랐다. 성이나 약물에 관한 뉴스그룹의 전송은 거부했고, 어떤 뉴스를 논쟁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에도 비민주적이었다. 백본 음모단이 유즈넷 이용자들을 향해 갑질을 휘두를 수 있었던 명분은 전송 비용 때문이었다. 포르노 따위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이 유즈넷 참여를 중단하기라도 하면 연결망은 축소되고 모뎀 속도와 저장 능력이 저하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서버-클라이언트 구조의 인터넷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돈이 문제였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포르노는 억압의 빌미이자 새로운 해방과 발전의 계기가 되곤 했다. 프랑스혁명에서 포르노그래피의 역할이 그랬고, 유즈넷에서도 이 역사는 반복됐다. 백본 음모단의 분류 체계에 반발한 이들은 아르파넷을 통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고안해 alt라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만들었다. ‘alt.drugs’, ‘alt.sex’ 등의 그룹이 87년에서 88년 사이에 창설됐다. 서두에 인용했던 존 길모어도 ‘백본 음모단 분쇄’의 주축이었다.
억압의 역사 역시 되풀이된다. 오늘날 애플과 구글 진영의 앱스토어는 백본 음모단 시절의 유즈넷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다. 이 플랫폼에 진입하기 위해선 등록비용을 지급해야 하며, 앱스토어 판매 총액의 30%를 애플에 수수료로 떼어줘야 한다. 안드로이드 마켓에선 수익의 30%가 통신사 차지다. 이런 식의 플랫폼 자본주의는 전형적인 지대 착취 구조다. 지대(rent)는 소유자가 노동자의 생산물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삼아 소득을 얻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불합리한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앱스토어 등록을 하려면 사전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심의 기준은 우리 삶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엑소니모가 애플 앱스토어에서 겪었던 굴욕은 우리 시대의 정보 환경에 드리운 거대한 벽의 실체를 지시한다.
이러한 현실에 반대하는 인터넷 블랙마켓 ‘야미이치’는 궁극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재기발랄한 문제 제기에 더 가까운 행사다. 이곳에서는 인터넷에 관련된 것들은 아무 규제 없이 팔 수 있다. 아트 퍼포먼스의 성격도 강한 행사다. 이곳에서 선보일 수 있는 것들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상관없다. 자유로운 발명과 창작, 표현이야말로 ‘야미이치’만의 공기다. 서울에서 처음 열리는 야미이치에는 예술계, 디자인계, 메이커 그리고 특정한 범주에 넣어 정의 내리기 힘든 창작자들이 모일 예정이다. 장소는 경복궁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보안여관’이다.
이번 야미이치는 ‘월드와이드 인터넷 야미이치 위크(World Wide Internet Yami-ichi Weeks)’로 확장됐다. 전 세계 5개 도시(대만 타이중, 오스트리아 린츠, 미국 뉴욕, 브라질 상파울루, 대한민국 서울)에서 2주 동안 동시 다발로 진행된다. 서울 행사의 오거나이저는 미디어 아티스트 후니다 킴, 뉴미디어 교육자이자 오프 하드웨어 해커인 김승범이 주축이 된 프로토룸(PROTOROOM)과 미디어 활동가 최빛나, 송수연으로 구성된 청개구리제작소(Fab coop)가 맡았다. 한국의 자생적 제작자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의 협업이다.
블랫마켓을 표방했지만, 서울 야미이치의 불온함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 불온함은 행사의 컨셉보다는 한국 인터넷 문화의 급진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청개구리제작소의 최빛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 이용의 편중된 속성 그리고 다른 인터넷에 접근하는 해커, 개발자, 예술가, 활동가들의 문화적 층위는 상대적으로 허약한 편입니다. 딱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큼의 도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강렬한 정치적 불온함보다는 위험하지 않은 풍자와 블랙유머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물론 이 짐작이 배반당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행사에 큰 웃음이 만발하길 바란다. 불길하고 수상한 시절의 한복판에서 터뜨리는 폭소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정치이자 불온함이다. 우리들의 상상력과 일상에 쾌활함과 기쁨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닫힌 인터넷을 깨뜨리는 첫 번째 길이다. 인터넷 블랙마켓의 도전을 응원한다.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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