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여름처럼 230여년 전인 정조 7년(1783)의 여름도 무더웠다. 그런데 정조가 거주하는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은 협소할뿐만 아니라 좌우의 담장이 바짝 붙어서 사방에서 햇볕이 들어왔다. 고종 21년(1884)의 갑신정변 때 개화파 김옥균 등이 고종 부부를 관물헌으로 이어(移御)하게 했던 것도 관물헌이 소수의 병력으로 청군(淸軍)의 공격을 막기에 적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일상과 언행을 기록한 ‘일득록(日得錄)’에 따르면 정조는 그 해 규장작 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서늘한 별전(別殿)으로 거처를 옮기자고 주청하자 바로 반대했다. 정조는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거기에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나아가 “이를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라고도 말했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 직제학 이병모(李秉模)에게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독서 피서법을 제시한 것인데, 이는 정조가 조선 후기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독서 군주였던 것이다.
물고기 세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동양화가 있다. ‘삼여도(三餘圖)’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삼여(三餘)란 뜻밖에도 독서하기 좋은 세 시기를 뜻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왕랑(王朗)열전의 주석인 위략(魏略)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홍농(弘農)직에 있던 동우(董遇)에게 시간이 없어서 독서를 못한다고 말하자 동우는 “마땅히 세 가지 나머지(三餘ㆍ삼여)만 있으면 독서할 수 있다”고 답했다. 누군가 삼여가 무엇이냐고 묻자 동우는 “겨울은 한 해의 여(餘ㆍ나머지)이고, 밤은 하루의 여(餘)이고, 흐리고 비 오는 날은 때의 여(餘)이다”라고 답했다. ‘삼여도’는 세 마리 물고기처럼 유유자적하게 놀라는 뜻이 아니라 잠시의 틈만 있어도 공부하라는 뜻의 ‘권학도(勸學圖)’이다.
조선의 유명한 독서광은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ㆍ1604~84)이다. 그의 시문집 ‘백곡집(栢谷集)’에는 자신이 읽은 글의 횟수를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라는 특이한 글이 있다. 백곡집에는 ‘독수기’와 ‘고문 36수 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가 있는데, ‘독수기’ 첫머리는 “백이열전은 1억 1만 3,000번을 읽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때의 1억은 10만을 뜻하는데, 사마천의 ‘사기’ ‘백이(伯夷)열전’을 11만 3,000번 읽었다는 것이다. ‘노자열전’ 등 일곱 편은 2만번을 읽었고, ‘제책(齊策)’ 등 다섯 편은 1만 8,000번을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만 독(讀)에 미달하는 편명은 ‘독수기’에서 제외할 정도였다.
김득신은 ‘백이열전’을 억만(십만)번 읽은 것을 기념해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고쳤는데, 십만이 넘는 독서 숫자를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뜻이 어찌 보면 병적인 집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독서량에도 과거운(科擧運)은 별로 없어서 번번이 낙방했다. 그런데 그의 후손인 김행중(金行中)이 쓴 ‘행장초(行狀草)’에 따르면 김득신은 쉰아홉 때인 현종 3년 임인년(壬寅年ㆍ1662)에 문과에 급제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김득신은 끈질긴 노력의 대명사로도 불렸다.
김득신의 ‘독수기’는 독서가(讀書家)의 나라였던 조선의 많은 선비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독가(多讀家)이자 그 자신이 방대한 양의 저술을 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다산은 ‘김백곡(金柏谷ㆍ김득신)의 독서를 변증한다’라는 글을 남겼는데, 다산 역시 “글이 생긴 이래 상하 수천 년과 종횡(縱橫) 3만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백곡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자고로 위대한 학자가 탄생하는 출발점은 대부분 남다른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다산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김득신이 ‘백이열전’을 11만 3,000번 읽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에 호기심이 생겼다. 다산은 독서를 잘하는 선비라면 하루에 ‘백이열전’을 100번 읽을 수 있으니 1년이면 1만 3,600번은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3년이면 10만 8,000번을 읽을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질병과 우환이 생길 수도 있고, 또 독실하게 효도하는 군자였으니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묻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의 일에 든 시간을 빼면 4년이 걸려야 11만 3,000번을 읽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다산은 ‘백이열전’을 읽는 데만 이미 4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다 읽을 수 있었겠느냐면서 ‘독수기’는 김득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작고한 후에 “누가 그를 위해서 전해들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추측했다.
무더운 여름이 가면서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다가왔다. 출판계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고 난리다. 김득신의 놀라운 ‘독수기’에 대한 논란 자체가 부러운 마음이 드는 책 안 읽는 후손들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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