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sbs ‘정글의 법칙’ 작가로부터 니카라과 정보를 수소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니카라과 변방의 찐득찐득한 정글에서 새해를 넘겼구나. 200% 습도 아래 악어가 득실대던 '마켄구에'에서. 한국의 새해는 늘 춥지만, 그 해 우리의 새해는 무더웠다.
보트를 놓쳤다. 니카라과의 남쪽 최전방인 '산 카를로스'에서였다. 산 카를로스는 니카라과 호수에서 카리브해로 이어지는 산 후안강의 시작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다른 섬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보트 매표소가 완고히 문을 닫았다. 파리도 하품하는 이 한량한 도시에서 티켓이 다 팔렸다고? 울화통이 터졌다. 다음 배편은 그로부터 4시간 후였다. 순식간에 목적지를 잃은 우린 탕탕의 시계나 고치자 했다. 만물 수리점에 가니, 주인이 무슨 문제냐고 랩을 해댔다. 졸지에 마임이스트 수준으로 설명하는데···
“What's your problem?”
그녀 이름은 베키. 순식간에 서로 말을 섞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유지가 있으며, 우리가 갈 ‘보카 데 사발로스’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했다. 사진을 찍는 탕탕과 글을 쓰는 나, 뿌리다가 교통비를 벌려고(!) 여행 기사를 만든다고 하니 흥미로운 시선이었다. 헤어지는 길, 그녀는 우리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하하. 농담하는 줄 알았다. 우리 같은 상거지 장기여행자가 전화기가 있을 리 만무하고, 이 지역 자체가 통신과는 거리가 먼 열대우림지대가 아니던가!
사람들을 물건처럼 쌓고 달린 보트는 보카 데 사발로스에 도착했다. 선착장 옆 노상에서 굽는 고기 냄새에 끌려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다. 관광지는 아니지만 촌 동네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일단 새의 종합선물세트다. 코스타리카에선 코빼기도 못 본 투칸(코스타리카의 국조다)도 이곳에서 조망했다. 강으로 갈려진 이 마을은 1코르도바(40원)만 내면 뱃사공이 둘 사이를 중매해 노를 젓는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풀고, 해먹에 몸을 뉘이고자 방문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어머!!!!!!!!!!!!!!!! 베키!!!!!!!!!!!!!"
농담처럼 그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길로, 우린 야밤에 자진 보쌈 당하여 보트에 올랐다. 그녀의 남편인 리토도 함께였다. 불빛 하나 없는 그곳에서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목소리와 별빛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5분여 달리자, 리토는 손전등을 켜고 보트의 속도를 줄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강이 깜빡이는 빨간 불빛으로 수 놓였다. 악어 눈이란다. 손전등에 반응한 악어의 눈동자가 발 밑에 지뢰처럼 깔렸단 소리다. 보트는 멈추고 그들의 오두막집이 낮은 조명 아래 보였다. 리토는 카메라 감독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늘 동물과 가까이하는, 자기만의 디즈니랜드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꿈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마켄구에'는 니카라과의 ‘리오 산 후안’지역의 2만3,000평이 넘는 열대 우림을 이른다. 2006년 이래 때론 렌탈하우스로, 가끔은 대학의 자연학습 및 조사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들의 정글 관리법은 단 한 가지, ‘내버려두기’다. 무차별적인 벌목과 사냥을 막고 자연이 스스로 자생하도록 하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현재 리토는 은퇴했고, 베키는 왕따와 편견을 막는 비영리 프로젝트인 ‘Not In Our Town’의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투박하지만 사려 깊은 식사로 늦은 저녁을 때웠다. 리토는 불안하게 자꾸 시계를 봤다. 올 때가 됐다고 했다. 눈까지 멀어버릴 이 밤에 누가? 드디어 주인공 납시오. 밤비(Bambi, 월트 디즈니 영화의 주인공인 수사슴)였다. 리토가 몸을 낮추자, 밤비는 늘씬한 목을 세우며 볼을 핥았다.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진짜 밤비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우리의 팔을, 볼을 열심히 핥았다. 베키와 리토는 사냥꾼으로부터 어미를 잃은 밤비의 어버이가 되었다고 했다. 난 밤비가 핥은 부위를 절대 씻지 않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했다.
그 다음날 새벽녘, 부츠 하나를 골랐다. 단단한 나무 지팡이도 집어 들었다. 베키가 새 구경을 하자고 간청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카드 놀이로 제정신은 침대 위에 있었을 터, 안개 핀 강과 밀림의 풍경이 우릴 깨웠다. 서정적인 풍경에 비해 우리의 행동은 서스펜스 그 자체였다. 지팡이로 늪에 빠지지 않을지 미리 가늠하고, 쓰러지고 버티는 갖가지 나무와 가지들을 피하느라 유연성 제로의 허리를 꺾어댔다. 누군가 “저기!” 하면 자동반사로 망원경을 들어 새를 관찰했다. 졸졸 뒤를 따르는 밤비를 익숙하게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날, 난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나의 서바이벌 식량인 초콜릿 바를 그에게 몰래 주었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베키는 새 백과사전에 오늘 발견한 네 마리의 새를 찾아 날짜와 시각을 기록했다. 그녀만의 새(bird) 역사였다. 리토는 그 사이 부상당한 악어를 돌보았다. 상태를 체크한 뒤 물가로 내보내면서 그들이 지어준 이름 "마리아나!"를 불렀다. 악어가 휙 돌아봤다. 애완동물처럼. "아빠 왜 불러?" 이런 것처럼.
열대우림답게 맑게 갠 하늘이 순식간에 비를 퍼부었다. 우린 다시 부부의 보트를 타고 보카 데 사발로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리오 산 후안을 바라봤다. 새해의 24시간, 스스로 경험하고도 믿기지 않는 현재에 감복하고 있었다. 동시에 베키의 한 문장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진정한 변화란 어떤 '시스템'이 아니라 각자의 '태도'를 바꾸는 거야."
이번 새해, 그 말에 한 표 걸어보련다. 어떤 상상하지 못할 행운이 우리에게 올 건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린 변화할 것이다.
●여행의 선물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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