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날씨가 뭐 이렇게 맹숭맹숭하지.’ 혼자 중얼거리며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을 즈음, 차고 딱딱하고 냉정한 날씨가 찾아왔다. 방심하며 돌아다니던 사람에게 외투에는 촘촘한 단추와 곧추세울 깃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 주고 걸음에는 종종걸음도 있다고 일깨워준다.
뒤꼍에 묻은 김칫독에 홀랑 벗겨 두었던 비닐과 담요를 덮고 돌멩이를 눌러놓는다. 도랑으로 연결해놓은 하수배관 끝에는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얼음석순이 구멍을 꽉 막아놓았다. 손도끼로 얼음기둥을 떼어내고 쇠지렛대를 가지고 언 배관을 쑤시며 준비성 없는 자신의 게으름을 혼자서 킥킥거린다. 그런데 문득 ‘이건 나가는 구멍만 문제가 아니라 들어오는 구멍도 큰 문제가 아닌가’는 생각이 떠올라, 지렛대를 팽개치고 골짜기 위쪽에 묻어둔 상수원 물통으로 달려갔다.
함지박으로 덮어놓은 뚜껑을 열어젖히고 우물처럼 파놓은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천만다행으로 조금 고여 흐르는 물은 막 살얼음을 덮기 시작했다. 오늘만 지나쳤다면 살얼음은 두꺼운 얼음이 되어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호스를 꽉 물어서 꽃피는 삼월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판이다. 화덕 옆에 쌓아놓은 장작가리에 비닐까지 덮어놓고 이제 한숨 돌린다.
만리산 건너편 잔설 희끗한 장군봉 능선에 흐릿하고 묵직한 기운이 서서히 밀려온다. 저 회색빛 하늘 속에는 수만 마리의 은어 떼 같은 눈송이가 천천히 유영하며 이리로 몰려오고 있을 것이다.
늦은 점심을 위해 식은 밥 한 덩이를 솥에 깔아 누룽지를 만든다. 밥알이 탁탁 소릴 내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퍼질 때 물 한 그릇 붓고 조금 기다리면 맛있는 숭늉 누룽지가 된다.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선 과수원이 보이고 그 너머로 겨울 파도를 정지시켜 놓은 듯한 능파의 고독한 풍경을 바라보며 홀로 먹는 점심은 잠시 움직이고 오래 정지하는 내 산골 생활의 한 호사다.
숭늉그릇을 비울 즈음 하늘과 대지의 빛깔을 모두 흐리게 칠한 허공에서 처음 수송이의 눈이 홀씨처럼 날아온다. 눈은 금세 수백송이 수천송이 사과꽃처럼 겨울 과수원 위에 떨어진다. 과수원을 따라 휘어진 길을 바라보며 나는 나타샤를 기다리는 북쪽 한촌의 백석처럼 고요하게 쓸쓸해진다.
그때. 눈보라 속을 달려오는 고라니처럼 자가용 한 대가 오솔길을 올라온다. 빵모자를 쓰고 차에서 내린 그는 마루에서 내가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뒷문을 열고 몸을 수그려 무엇을 꺼내느라 부스럭거리고 있다. 나는 얼른 다가가 문 밖에 나와 있는 그의 엉덩이를 툭 친다.
내 친구 유환이! 그와는 함께 삼십 년을 훌쩍 넘긴 오랜 벗이다. 그는 바람처럼 떠도는 사람이고 나는 토굴 속에 움츠리는 사람이다. 이십 대 청춘 이후로 길이 갈려 나는 주로 산중으로 그는 도시를 떠돌며 살았다. 일터를 옮기며 주로 기숙사나 자취 생활을 하는 그의 거처를 나는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양양이건 치악산이건 봉화 산골짜기건 내가 숨어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불쑥 찾아온다. 그것도 점쟁이처럼 그리운 날을 알아 찾아온다.
“눈 오는데 어떻게….” “응. 눈 오니까 왔지.” 종이박스를 풀며 처삼촌 보듯 한다. 전주에서 봉화까지 다섯 시간을 달려 왔단다. 이유는 그냥이다.
그는 마당 화덕에 불을 붙인다. 삭정이에 장작을 올려놓고 물 부은 가마솥에 돼지사골 한 포대를 쏟아 붓는다. 돌 뚜껑 덮은 굴뚝을 비집고 나온 연기가 겨울 숲으로 스며든다. 아궁이의 시뻘건 잉걸을 부지깽이로 긁어내고 철망을 올려놓는다. 노릇하게 구워지는 삼겹살 위로 흩날리는 눈송이가 떨어진다. 장작토막을 깔고 앉은 두 중늙은이의 투명한 소줏잔에 사과꽃 한 잎 같은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전생에 나한테 돈 꿔준 거 있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게.” “아니 내가 많이 꿨나 보지 빚 갚으러 이렇게 쫓아다니잖아.” 뭐 이 정도의 댓거리를 하느라고 우리는 삼십년을 넘게 붙어 다녔나 보다. 단지 그리움이 목적인 사람이 그리운 날 그 또한 그래서 찾아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는 아니 올 리 없다/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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