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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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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응답하라 1988

입력
2016.01.2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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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막을 내린 동네 가족 판타지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에게 1988년은 첫사랑에 빠진 해이다. 주인공들은 그 무렵 동네 친구 중 한 명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결국 그 첫사랑과 결혼한 뒤, 나른하게 옛 시절을 회고한다.

이 나라의 정치사에서 1988년은 시민들이 직선제와 사랑에 빠진 해이다.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이 어렸을 무렵 유신체제는 강고했다. 그러나 1979년, 정권의 말로를 선언한 YS의 예언에 화답이라도 하듯, 재규어는 유신의 심장을 쏜다. 야수의 열정으로. 그러자 DJ는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다렸다는 듯, 신군부 세력은 간접선거를 통해 재집권한다. 쿠데타나 암살뿐 아니라 간접선거로도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시민들은 직선제와 사랑에 빠진다. 직선제는 정치적 자기애(自己愛)의 극치다. 선한 우리가 직접 결정한다면 잘 될 거야. 고문으로, 최루탄으로, 투신으로 여러 사람들이 죽고 나서야, 집권세력은 6ㆍ29 연극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한다. 너희들은 이제 직선제와 결혼해도 좋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토록 타도하고 싶었던 신군부의 일원을 대통령으로 다시 뽑는다. 피의 대가로 쟁취한 바로 그 직선제를 통해서. 그때가 1988년이다.

그 1988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실리고, 뒤이어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개봉했다. 정치의 열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한없이 가벼워진 사적(私的) 존재가 마침내 누리게 된 어떤 짧은 행복과 우연한 죽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끼고 싶어, 차를 타고 가야 할 먼 거리를 일부러 걸어 극장으로 갔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끝나는 영화 끝 장면. 다가온 우연을 예감하듯이 여주인공은 자동차 안에서 연인에게 말한다.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 중이에요.” (I am thinking how happy I am) 그것은 정치적 자아가 너무 무거워, 사적인 행복을 염원하던 이의 행복. 행복한 자신에 대해 마침내 자의식을 갖게 된 이의 짧은 행복이었다.

그 후 정말 사적인 행복이 이 사회에 도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기수들이 오랜 수감생활 끝에 감옥에서 나왔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내려졌다. 노트북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처럼 PC 통신을 시작했다. 일본 대중문화 유입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용산전자상가는 활기를 띠었다. 캠퍼스에는 커밍아웃을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졸업하면 대체로 취직이 되었다. 빚을 내어 아파트를 사도 가격은 올랐다. 큰 근심이 없는 이들은 작은 근심을 누릴 수 있었다. 이때가 1990년대 초이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직선제를 사랑했듯 나라를 사랑했다. 시민 혹은 백성의 열정으로. 많은 이들이 금모으기에 나섰다. 그리하여 구제금융을 졸업한지 이제 15년, 각종 지표들은 다시 악화되었다. 그 사이에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은 투신자살했고, 빈부격차는 벌어졌고,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고, 쌓이는 피로처럼 가계의 부채는 늘어가고, 번식에의 열정마저 시들어간다. 그리고 이미 과거가 된 줄 알았던 정치적 의제들은 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부활했다. 이 부활한 정권의 국무위원 미팅에서 장관은 정초부터 이탈리아산 아포리즘을 구사한다. “피자에 4개 요소가 있는데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열정이라고 합니다. 열정이 없으면.” 최초로 직선제에서 과반수 득표를 한 대통령답게, 장관의 말을 끊고 “(열정이 없으면) 안되죠”라고 미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다시 자기애에 빠질 수 있을까. 직선제의 단점은 공화국의 상태에 대해 너무 직선적으로 알려준다는 것이다. 정말 이곳은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열정으로만 이루어진 나라가 아닐까. 이곳에서 치즈는 가장 외로운 식재료이다. 수십 년의 현대사가 반죽한 뜨겁고 짠 밀가루반죽. 불행한 자신에 대해 마침내 자의식을 갖게 된 밀가루 반죽. 치즈가 빠진 거대한 고르곤, 졸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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