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파시스트가 되는 때가 있다. ‘20대 여성, 홀로 아기 낳아 화장실에 버려’ ‘게임 중독 부모, 수개월간 아기 굶겨 사망케’ ‘장 파열되도록 때린 비정한 아빠’ 같은 기사들을 볼 때다. 혈관을 따라 퍼지는 건 산소가 아니라 분노. 한낱 오토바이를 타는 데도 면허가 필요한데, 왜 부모는 아무나 되나. 왜 어떤 부모는 악마이고, 어떤 아이는 그 부조리 속으로 속수무책 내던져지나. 누가 저들에게 함부로 부모 될 자유를 허락했나.
맞고 자란 부모가 자식을 때린다고, 폭력의 대물림을 이야기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유행하는 아들러 심리학을 인용해보자.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결여의 핑계일 뿐이다. 똑같이 맞고 자랐지만 어떤 이는 내 자식만은 그런 아이로 키우지 않겠다고 눈물을 삼키고, 어떤 이는 보고 자란 게 이것뿐이라는 듯 폭력을 되풀이한다. 이때 폭력 아버지는 유의미한 변수인가? 폭력 가해자의 70%가 어린 시절 폭력을 경험했다는 통계는 어려서 폭력을 겪었지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 사람들의 대조군 없이 인용될 수 없다. 방치되고 학대 받았던 어린 시절이 너무 싫어서 내 자식만큼은 사랑으로 키우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엄마와 아빠들을 나는 많이 안다. 배우고 못 배우고, 잘 살고 못 살고의 차이도 아니다.
모든 부모는 목숨을 바칠 정도로 아이를 사랑하도록 자연설계 돼 있다는 진화론적 통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이는 생경하고 부담스러운 타자의 모습으로 당도한다. 나는 연약한 새의 모습으로 들이닥쳐 전 존재를 의탁한 아이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첫 출산 후 일주일을 울었다. 왜 아무도 내게 엄마 되기의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나. 20년 가까이 학교를 다니고도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나는 분노했다. 학생의 본분은 그렇게 주입하면서, 긴 세월 지녀야 할 엄마의 정체성은 왜 가르치지 않는가.
끊임없이 어미를 호출하는 지상 최고의 약자에게 응답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받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모성은 발생하는 게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다. 구축에 실패하면 모성은 없다. 사랑은 응답이고, 응답의 축적이 곧 모성이다. 모성은, 그리고 부성도, 결코 본능이 아니다.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단어 ‘responsibility’가 응답(response)과 능력(ability)의 결합으로 이뤄진 합성어라는 사실은 절묘하다. 육아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반응하는(responsive)’인 이유이기도 하다. 응답 받지 못한 아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며, 응답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 응답의 교환을 통해 아이는 부모에게 제 매력을 끝내 설득해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우주적 존재가 된다.
섹스를 하면 아기가 생기고, 아기는 낳으면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라는 명료하고도 엄중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 약동하는 진실을 죽어있는 활자로 인식하는 한 괴물 출몰은 막기 어렵다. 부모가 응답하지 않는 괴물일 때 늘 곁에 있는 아이는 얼마나 손쉬운 약자인가. 중·고교 필수과목으로 ‘부모 되기’를 신설하고, 아기 돌보기 실습과 봉사활동을 의무화하자는 출산 직후의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일 수 없을 만큼 세계는 참혹해졌다. 존 볼비의 애착이론을 수능에 출제해 일평생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안정애착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자. 아기들은 순한 아이와 까다로운 아이, 느린 아이로 나뉘고, 각각 그 비율은 40%, 10%, 15%이며, 까다로운 아이에게 적합도 높은 양육모델은 처벌적 훈육이 아니라 따뜻한 포용과 인내임을 외우게 하자. 진담으로 하는 말이다.
잇단 아동학대·살해 사건은 임신과 출산 이전에 육아의 유사체험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공동체 붕괴 사회가 빚어낸 참사다. 훈육과 학대는 한 끗 차이, 성찰과 수련 없이는 부모가 아니라 괴물이 된다. 교육의 강제를 통해서라도,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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