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딸 남매를 키우는 워킹맘 A씨는 요새 ‘터닝메카드’ 장난감을 구해다 대령하느라 바쁘다. 주인공 에반은 물론 타돌, 타나토스, 피닉스, 크로키, 나백작 등 수많은 메카니멀들이 이미 집에 있건만, 끊임없이 새로운 주문이 나와 지칠 무렵. 가깝게 지내는 이웃집 아이 엄마와 몇몇 캐릭터를 교환하자는 아이디어가 오갔다. “○○이(아들)도 어지간히 터닝메카드를 좋아하나 봐요”라고 이웃 엄마는 물었지만, 사실 더 열렬한 팬은 딸 아이. 아들만 키우는 이웃 엄마는 “요새 터닝메카드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다”며 “우리 형님네도 초등학교 3학년 딸애가 그렇게 사달라고 조른다더라”고 말했다. A씨는 묘하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자 아이들이 ‘시크릿쥬쥬’ 대신 ‘터닝메카드’에 열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남자 아이들이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망토를 두른 채 ‘렛잇고’를 열창하는 것은 걱정할 만한 일일까? 오랜 투쟁의 결과로 성인들이 현실세계에서 이뤄낸 양성평등의 많은 성취들이 유독 어린이들의 장난감 세계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정부 공식 정책홍보 블로그가 새댁 1인칭 시점의 명절 준비 게시물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과문을 올리는 세상이지만,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장난감 섹션을 거닐다 보면 온통 블루와 핑크로 도배된,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두 세계가 여전히 공고하다. ‘콩순이’와 ‘달님이’를 제품명으로 달고 있는 주방놀이세트와 아기 키우기 같은 돌봄 노동, 미용실 놀이 같은 꾸밈 노동을 놀이화한 장난감들은 핑크빛 테두리를 두른 채 금남의 집처럼, 남아 위주로 돌아가는 완구 섹션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완구업계 “장난감 성별 구분 없애라”
지난해 전세계 완구업계의 최대 이슈는 젠더 중립성이었다. 젠더에 따라 철저하게 남아용과 여아용으로 분리된 블루와 핑크의 세계를 주제별, 관심사별 카테고리로 전환하는 일련의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세계적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은 남아완구와 여아완구로 구분돼 있던 카테고리를 지난해 5월부터 아동완구로 통합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종합유통업체 타깃(Target)도 8월부터 매장에서 남아용, 여아용 표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디즈니 스토어도 지난해 핼러윈 코스튬에 남녀 구분 대신 ‘아동용’ 라벨을 사용했다.
젠더 중립성 요구는 장난감의 분류와 진열에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니다. 제품 자체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바비 인형으로 여성의 보디 이미지를 왜곡하고 주체성을 억압한다는 비판에 시달려온 미국 마텔은 하이힐 대신 플랫슈즈를 신은 여성 슈퍼히어로인 ‘DC 슈퍼히어로 걸스’를 출시했다.
아메리칸 뷰티 아이콘인 바비는 57년의 역사가 사회적 비판 여론의 수용과 대응으로 점철돼 있지만, 최근의 변화는 가장 파격적인 것이었다. 키 큰(tall) 바비, 키 작은(petite) 바비, 통통한(curvy) 바비, 세 가지 다른 신체 사이즈를 선보인 것. 듣는 누구도 기분 나쁘지 않도록 언어 선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 역력한 새 바비들은 통통한 바비가 전혀 통통하지 않다는 비판-그래서 굴곡 있는 몸을 뜻하는 ‘curvy’가 해당 단어로 채택된 것-을 받고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여아들이 자기 신체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그간의 비판을 떠올리면 높이 평가할 만한 시도다.
장난감의 광고 마케팅에도 젠더 중립성 바람은 강하게 불었다. 북유럽 최대 장난감 유통업체인 탑토이는 2012년부터 남아와 여아가 함께 다림질을 하거나 총싸움 놀이를 하는 모습을 담은 카탈로그를 발행하고 있다. 부엌일이나 다림질 같은 가사 활동이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활동이며 총싸움이든 공주놀이든 근본적으로 놀이에는 아무런 구분과 차별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젠더 중립적 장난감이라는 화두가 실질적이고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일단 젠더의식을 가진 소비자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항의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젠더 교육을 받으며 살아온 밀레니얼 세대가 엄마가 되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완구·유통업체들은 점차 확대되는 이 시장을 간과할 수 없게 됐다.
2014년 레고사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편지를 보내 전 세계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7세 여아 샬롯이 대표적. “왜 레고의 여자 캐릭터는 집에 있거나 해변에 나가거나 쇼핑을 하고 직업이 없나요? 남자 캐릭터는 모험을 하고 일을 하고 사람을 구하고 상어와 헤엄을 치기도 하는데 말이죠. 여자 캐릭터를 더 많이 만들어서 여자들도 모험을 떠나고 재미있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이 편지로 인해 과학자, 기술자, 탐험가 등 여성 레고 캐릭터들이 출시돼 큰 화제가 됐다. 레고가 2012년 출시한 여아용 레고프렌즈 라인은 핑크와 보라색으로 된 블록조각, 굴곡진 몸매의 피규어, 미용실과 승마 콘셉트 등으로 나오자마자 비판을 받았다. 이후 발명가 스튜디오, 수의사 사무실 등 플레이세트를 추가해 큰 성공을 얻었지만, 여전히 레고프렌즈의 주력은 소비하고 멋 부리는 여성 캐릭터다.
50년 전보다 심해진 장난감 성별 구분
부모들의 젠더 인식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성별 구분을 선호한다. 쇼핑의 편의 때문만은 아니다.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게 자리잡지 않을 경우 아이의 성 정체성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작용하고 있다. 성인 세계에서 보기 힘든 무수한 젠더 상품들이 그 예다. 옷과 책가방뿐 아니라 치약과 칫솔, 식판과 수저, 껌과 비타민 포장지까지도 아동용 상품은 모든 것이 젠더화돼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들은 자동차를 좋아하고 딸은 인형을 좋아하는 식의 근본적 성차라는 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토록 치밀하고 강고한 젠더 구분은 1990년대 이후의 현상이다. 미국 UC데이비스 사회학 박사인 엘리자베스 스위트는 “1990년대 이후 완구 마케팅은 성 차별이 당연한 규범이었던 50년 전보다도 훨씬 심하게 젠더화돼 있다”는 연구로 화제를 모았다. 그의 2014년 ‘애틀란틱’ 기고에 따르면,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완구제조사의 광고 카탈로그를 분석한 결과,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이 요동쳤던 1970년대에 남아용과 여아용을 명확하게 구분해 광고하는 장난감은 전체의 2% 미만이었던 반면 90년대 중반부터 절반 이상으로 그 비율이 급증했다.
페미니즘의 퇴조와 함께 남녀 사이에는 태생적 성차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점점 보편화한 탓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책략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성별 구분이 공고한 것이 시장을 확대하는 데 훨씬 전략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성 구분된 장난감에 대한 반격’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완구시장이 성별이 다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이중의 지출을 하게 만들어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별 구분에 기반한 마케팅 때문에 핑크색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남자아이는 “여자 같다”거나 “게이”라는 놀림을 받게 되고, 부모들은 딸이 쓰던 핑크 자전거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된다는 것. 이런 경향은 특히 남아에게 더 심하게 작용하며, 이는 사회 전반에 퍼진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여아용 슈퍼히어로는 환영과 상찬 속에 출시됐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겨울왕국’의 대대적 히트에도 불구하고 엘사 드레스를 입은 남아는 보기 힘든 이유다.
누구나 원하는 것 갖고 놀 수 있어야
젠더 의식이 서구사회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한국은 장난감의 성별 구분만 강력한 게 아니라 장난감 시장의 성별 규모에서도 큰 격차가 존재한다. 이마트의 전체 완구 매출에서 여아용 제품비중은 2015년 16.6%였던 반면 남아용은 33.7%로 두 배 이상이었다. 품절 대란으로 화제가 되는 장난감도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레고 닌자고, 터닝메카드 등 모두 남아용 제품이다. 국내 완구 시장이 90% 이상 TV 애니메이션과 연동돼 있고, TV 애니메이션이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남아 편향이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 해석. 실제로 남아 대상의 콘텐츠가 여아보다 4~5배가량 많다. 완구업체 ‘밤나무’의 박형진 대표는 “여아는 상대적으로 옷, 머리띠, 가방 등 액세서리로 범주가 분산돼 있는 데 반해 남아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물의 형태로 시장이 형성돼 있고 쏠림 현상도 심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시장 구조는 터닝메카드의 이소벨과 다나, 미니특공대의 루시 같은 한국적 여성 히어로를 만들었다. 여아만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 어렵다 보니 여아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여성캐릭터들이 강화된 남아용 콘텐츠가 속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터닝메카드 메카니멀 제조사인 손오공 기획실의 한아름 대리는 “터닝메카드는 기존의 헬로카봇이나 다른 로봇 시리즈에 비해 여아들의 반응이 열광적”이라며 “여성 캐릭터들의 높은 비중과 존재감, 형제관계, 연적관계, 의형제 관계 등 다양한 유형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관계지향적인 여아들에게 어필하는 요소인 것 같다”고 말했다. 30여종이 넘는 메카니멀 중 명백한 여성 캐릭터는 미리내, 만타리, 요타 3종뿐이지만, 나머지 캐릭터들도 성별 중립적인 동물들이거나 컬러가 다양해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분석이다.
젠더화된 장난감의 폐해는 많은 연구들에서 이미 입증됐다. 장난감을 통해 주입되는 성별 역할과 분업은 아이의 관심 분야를 제한하고, 자기 고유의 즐거움을 은폐하도록 만든다. 놀이를 통해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차단한다. 키 오누라라는 영국 여성 엔지니어의 조사 에 따르면, 엔지니어링 학위를 가진 영국 여성의 비율이 30년 전 12%에서 2014년 8%로 떨어졌다. “사회가 장난감을 통해 ‘과학, 기술, 건축 같은 건 여자아이들 것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준 결과”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장난감은 매우 중요해요. 아동의 발달·형성 과정에 결정적이니까요.”
명절을 앞두고 장난감 박스 속 ‘달님이 냉장고’를 노려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난감이 ‘콩순이 주방놀이’와 ‘달님이 냉장고’뿐이라면 한 번쯤 고민을 해봐야 할 때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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