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참 좋은 봄날이다.
통나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잠시 해바라기를 한다. 어혈을 풀 듯 살갗을 문지르는 바람이 좋다. 쑥쑥 솟아오르는 새 풀의 젖 냄새를 품은 공기가 모래 속에 스미는 물처럼 달다. 구덩이에 묻어둔 감자처럼 쭈글쭈글하던 주름이 펴지는 듯 몸이 스멀거린다. 각기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속내야 어떻든 간에 볕이 참 좋은 봄날이다.
봄은 혈관이 풀리는 계절이다. 계곡물 끌어다 쓰는 호스 속에 꽉 막힌 얼음이 풀리고 쫄쫄 물방울이 떨어진다. 땅 위 몸과 땅 속 몸이 서로 불통하여 까칠하게 말랐던 나무들이 실 같은 가지 끝 하나까지도 핏줄을 연결한다. 담벼락에 거미줄처럼 붙어있던 인동덩굴도 그 가늘고 까칠한 줄기마다 숨을 밀어 올려 새잎의 눈망울을 달았다. 발톱이 가려운지 새들은 재잘거리며 찔레나무 덤불에 자꾸만 발을 비빈다.
신발장 서랍 속에 두었던 작은 종이상자를 꺼낸다. 몇 개의 편지봉투 속에는 지난 가을에 강화에 계시는 홍 화백 사모님이 보내주신 꽃씨가 들어있다. 흰 봉투마다 예쁜 손 글씨로 씨앗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족도리꽃, 채송화, 분홍 접시꽃, 분꽃, 맨드라미, 과꽃, 그리고 ‘이건…(잘 모르겠는데 꽃피면 물어보세요)…’ 꽃피면 물어보라는 그 말이 꽃처럼 아름다워 머릿속으로 잉크 빛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아지랑이 속을 걸어간다.
씨앗 봉투를 들고 꽃밭으로 간다. 파란 물뿌리개를 꺼내오고 대추나무 가지에 걸린 호미를 찾아온다. 묵은 꽃밭의 머리를 갈퀴로 긁어낸 다음 소녀의 편지를 읽듯 하나씩 봉투를 열어 꽃씨를 심는다. 이 마른 씨앗들은 이제 깊은 어둠 속에서 침묵을 견디고 고요를 읽는 시간이 지나면 푸른 싹을 터뜨려 무장무장 자랄 것이다. 매미 울고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이 오면 저마다 머리에 희고 붉고 노란 꽃을 머리에 달고 자신의 한 삶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그리고 오래도록 꽃들의 말을 들을 것이다 물론 벌들과 나비들도 함께 듣겠지. 키가 불쑥 큰 해바라기는 그것이 궁금해서 고개 숙이고 기웃거리겠지. 나는 지금 이렇게 여름과 가을이 배어있는 봄을 심고 있다.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새로 이사 온 묘목을 돌아본다.
절기는 봄일지라도 삼월의 초입은 아직 쌀쌀할 때였다. 마음은 봄이로되 몸은 아직 겨울 점퍼를 벗지 못하는 날씨에도 봉화시내를 벗어나는 길가에는 길게 늘어놓은 묘목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듯하게 잘 키운 소나무나 목련나무는 둥그렇게 분을 떠서 뿌리를 보호해준다. 그런데 어린 묘목일수록 맨발을 벗고 몸통을 잘린 채 차가운 보도 블럭 위에 뭉텅뭉텅 엮여있다. 나는 어쩐지 그것이 어린 킨타쿤테들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바닥에 빨간 코팅을 한 목장갑을 끼고 군용파카를 입은 묘목상은 길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하며 차에서 내린 손님을 맞는다.
아내는 올 봄도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작년 봄 꽃망울이 몇 개 달린 백목련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자기 탓인 양 안타까워하더니 다시 백목련, 자목련, 벚나무 다섯 그루, 남천 열 그루, 왕보리수 한 그루를 입양하듯 데려와 어린 맨발에 흙 양말을 신겨주었다. 나무는 ‘심은 자랑 하지 말고 키운 자랑’을 하라는 말이 있다. 해마다 몇 그루씩 죽이고 또 살리며 나무식구를 늘려간다. 새 식구들에게 물을 흠뻑 주고 발아래 흙을 북돋아준다.
눈만 뜨면 나무들이 보이는 숲에 살면서 또 묘목을 심는 까닭은 보살피는 책임과 가꾸는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기 책임 아래 무엇을 묶어둔다는 것은 큰 강박인 동시에 보람의 근원이다. 화분의 꽃이 시들 때는 자신의 생활이 병들었음을 금방 느낀다.
은빛 자작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먼 능선을 바라본다.
자신을 위로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가장 못살게 구는 것은 나 자신이다. 타인이 나를 괴롭히는 것 보다는 내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안달복달하는 것이 결국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그들에게 나를 심어주지 못해 안달하는가.
봄볕이 맑다!. 세상에 함부로 손들지 말고 나무와 풀꽃처럼 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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