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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남성성의 비극

입력
2016.06.0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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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 반대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단체 회원이 반대문구가 적힌 카드를 들고 있다. 뉴시스
여성 혐오 반대 집회에 참석한 한 여성단체 회원이 반대문구가 적힌 카드를 들고 있다. 뉴시스

“혹시나 내 주변에도 가면을 쓴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길을 가다가도 묻지마 폭행을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 특히나 밤길에는 혼자 슈퍼 가는 것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무서워요.”(인터넷 블로그 중에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던 오래된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혐오라는 유령이다. 이 유령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또 어디에서나 출몰하고 있으며, ‘잠든 사람들의 마을’에 재난과 함께 나타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인다. 인용한 여성 블로거의 솔직한 글 속에서 우리시대의 혐오가 만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까지 만들어내고 있음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놓고 한국 사회가 뜨겁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여성혐오의 전형적 사건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가 신학대학을 중퇴하고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교회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했고 이때부터 여성혐오증이 시작돼 사건을 일으켰다는 언론 보도를 근거로 내세운다. 반면 경찰은 ‘여성혐오’가 논란을 부추길까봐 이를 ‘묻지마 살인’이라고 서둘러 결론 내렸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범인의 우발적 범행이란 해석이다.

‘혐오’의 사전적 풀이는 간단하다. 글자 그대로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한다. 혐오라는 감정 작동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혐오를 낳는 어떤 구조일 것이다. 특정한 국면, 구조가 혐오를 만들어낸다면, 이는 혐오가 만들어지고 관리될 수도 있다는 해석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을 호명해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낸 나치가 그렇고, ‘흑인’ 인종차별로 백색 테러를 조장했던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도 모두 ‘혐오’를 정치적으로 관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은 이 한국적 혐오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밀어올린 비참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역사는 늘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여성혐오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혐오의 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떤 단초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허윤 이화여대 국문과 초빙교수의 논문 ‘냉전 아시아적 질서와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역사문제연구’, 2016년 35호)를 일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2015년 한국사회의 키워드는 혐오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IS로 떠난 김군이나 ‘무뇌아적 페미니즘’을 염려하는 방송인 등 연초부터 여성혐오 발언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여성혐오의 ‘백래시’로 페미니즘이 부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그의 분석이 흥미로운 것은 “여성혐오가 어떠한 의도적 ‘무관심’에 의해 유지되는가”를 고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상 시기로 현대 한국사회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1950년대에 주목한 것도 그렇다. 물론 그의 접근은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2013)에서 여성혐오에 대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 여성에 대한 멸시”라고 정의한 것 위에서 펼쳐졌다. 그는 1950년대 한국의 여성혐오의 민낯을 ‘전후 공통 감각’에서 찾아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이 배태한 ‘군복의 남성성’은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군인다움과 용맹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철저한 의존을 요청하기 위해 여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허윤은 여기서 한국사회가 표방하는 남성성이 얕은 토대를 갖고 있기에 무언가를 방패로 삼아야 했다고 지적한다. 그 방패가 된 무언가가 바로 ‘남성성을 대리보충하는 과잉된 여성성’이었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서는 남성성의 공간인 전방과 달리 후방은 바로 이들에 의해 ‘혐오와 수치심으로 가득한’ ‘여성화된 후방’이 된다. 허윤은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냉전 질서 하에서 통치 도구로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2016년 한국사회를 달구는 ‘여성혐오’가 과연 이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성혐오가 아닌 ‘혐오’ 일반을 보면 어떨까. 혐오에 관한 질문은 여성의 성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피력한 김종갑 건국대 영문과 교수의 논문 ‘혐오와 여성의 살: 정동과 감정’(‘안과밖’, 2016년 40호)이 참고할 만하다. 그는 혐오(감)가 역사적이며 계층적이고 젠더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다양한 문학 텍스트를 통해 이를 확증하려고 한다.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혐오감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현대에 더욱 지배적인 감정이 되었다. 혐오의 감정은 강박증적으로 청결과 위생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의료화된 문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김종갑의 생각 속에서 눈에 번쩍 띄는 것은, 여성혐오가 여성의 살 속으로 흡수돼 남성적 정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 나아가 혐오의 감정은 자신의 몸에서 발생하는 운동과 변화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문화적 코드와 해석 과정을 통해 주체화된 결과라고 읽어낸 대목이다.

허윤과 김종갑의 논문에서 여성혐오가 일종의 통치 도구로 작동한다는 것(허윤), 그리고 혐오가 문화적 코드와 해석 과정을 통해 주체화된 젠더적 결과(김종갑)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이란 점은 최소화하고 조현병을 앓던 개인의 우발적 범행으로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날 강남역에서의 살해도 희생도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에 그칠지 모른다. 혐오의 구조, 그리고 여성혐오가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인지를 따진다면 결국 그것은 좌절당한 불안한 영혼의 한 개인이 아니라, 이들 영혼의 파멸을 자양분으로 자라나는 어떤 괴물 같은 구조를 향해야 할 것이다.

최익현 교수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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