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대 자산가 A씨는 결혼 전 아내 될 사람과 혼전계약서를 쓰고 싶어 변호사를 찾았다. 혹시라도 이혼시 발생할 재산분할에 대한 분란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A씨가 특유재산(결혼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은 한 푼도 주지 않겠다는 야박한 계산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결혼생활 3년 후 이혼시 수억원을 지급하고 햇수가 늘어날수록 금액도 제법 크게 비례하는 내용으로 오히려 변호사를 놀라게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초안은 빛을 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결혼하기 전에 이혼부터 전제하고 있냐는 힐난을 받을 것이 너무 뻔해 도무지 신부 앞에 들이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B씨는 몇 년 전 결혼하면서 변호사를 두고 미국식 혼전계약서(prenuptial agreement)를 썼다. “최대한의 노력으로도 결혼 유지를 할 수가 없을 때, 논란이 될 수 있는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 미리 정리를 해두어서 서로 바닥까지 보이는 것은 막자라는 취지”에서였다. “혼전계약서를 쓰면서 결혼하기 전에 서로 나눠야 하는 여러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는 B씨는 한국의 친구들에게도 쓸 것을 추천하고 있다.
“혼전계약서 쓰고 싶은데…”
미국 억만장자와 할리우드 스타들이나 쓰는 것으로 인식되던 혼전계약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간통죄가 폐지된 이후 필요성이 제기되던 혼전계약서는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처럼 유명인사들의 불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언급되는 단골 소재다. 사랑과 돈이 반대말은 아니라는 명확한 인식의 변화는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결혼정보업체 듀오와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운영하는 듀오휴먼라이프연구소가 올 초 25~39세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혼전계약서가 필요하다는 응답자는 53.1%로 절반을 넘었다. 그 중에서도 나이가 많아 소득도 높을 가능성이 있는 35~39세 연령대에서 56.6%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미국에서 건너온 혼전계약서는 말 그대로 결혼 전(premarital, prenuptial) 작성하는 부부 쌍방의 계약서로, 결혼 종료시 재산 분할에 대한 내용을 담는 문서를 말한다. 이혼을 해야만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문서다. 한국에서는 민법 제829조에 결혼 전 각자의 재산과 채무를 정리해 법원에 등기를 하도록 규정한 ‘부부재산약정등기’ 조문이 있으나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했다.
혼인계약서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실제 계약서를 쓰기 위해 변호사를 찾는 예비부부는 아직 많지 않다는 게 가사 전문 변호사들의 전언이다. 드러내놓고 돈 문제를 거론하기 꺼려하는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와 법적, 제도적 장치 미비로 쓰고 싶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혼전계약서가 이혼시 재산분할의 내용만 담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예비부부들은 부부생활 수칙 등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도 차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재산과 관련된 조항과 기타 조항이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이 다르다는 것. 서혜진 변호사는 “동산이나 부동산 등 재산과 관련된 계약일 경우 제3자 공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공증을 받아야 효력이 인정되는 반면 부부 상호간 지켜야 할 혼인생활의 원칙 등은 당사자간 약정으로 그 자체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말했다.
“우리 혼전계약서 썼어요”
부부는 애정공동체인 동시에 재정공동체이기도 하다. 이혼시 발생할 추잡한 재산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혼전계약서를 쓰지만, 그 과정에서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결혼생활에 기분만 잔뜩 상할 수도 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을 지낸 이명숙 변호사는 “이혼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게 재산분할을 둘러싼 다툼”이라며 “결혼 후 형성된 재산에 대한 기여도를 놓고 싸우는 부부들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쌍방의 이익을 보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법정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쓰는 게 좋다”고 권했다.
혼전계약서가 이혼시 효력이 발생하는 문서이기는 하지만, 이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의미한 문서는 아니다. 부부가 공통으로 합의, 추출할 수 있는 결혼생활의 원칙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올 10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윤모(28), 박모(29)씨 커플에게 혼전계약서 작성을 부탁했다. 신부인 윤씨는 평소 관심이 있었고, 신랑 박씨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협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15개 조항으로 작성된 이 예비부부의 혼전계약서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하지 않는다 ▦폭력은 절대 금물이며 대화로 해결한다 ▦절대 각방을 쓰지 않는다 ▦임신은 부부 간에 상의 후 결정한다 ▦아이가 태어날 경우 부부가 번갈아 육아휴직을 한다 ▦집안일은 5대 5로 분담한다 ▦1회 10만원 이상의 지출 시 상대방에 알린다 등이 포함돼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귀책사유와 무관하게 이혼시 재산의 50%를 상대방에게 주기로 한 것. 윤씨는 “결혼 후 형성된 재산에 대해서는 귀책사유와 상관 없이 반반씩 나누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며 “조만간 변호사 친구를 만나 공증까지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명숙 변호사는 “혼전계약서는 결혼생활을 성실히 지속하고 재산 증식과 유지에 힘을 모으기 위해 부부가 공동으로 맺는 약속이자 다짐”이라며 “자기 소유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명확히 해두고 미리 생활비나 경조사비의 사용 원칙 등을 정해두면 공연한 갈등이나 불필요한 다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혼전계약서를 쓸 때는
혼전계약서를 쓰는 것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두 사람의 낭만적 결혼 구상에 구정물을 튀기는 것일 수 있다. 추잡한 혼인파탄의 과정을 막기 위해 혼인성립의 과정이 추잡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혼전계약서가 결혼을 약화하기보다는 배우자 쌍방이 재정적으로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강화한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 이혼전문 변호사 셰릴 영은 올 초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알지 못하는 자산과 부채 등 재정상황에 대한 상호 불이해가 결혼생활에 고통스런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 있다”며 “특히 자산이 있거나 상속받을 유산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쓰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혼전계약서가 법적 효력을 인정 받으려면 법리에 벗어나는 내용이 들어있으면 안 된다. 서혜진 변호사는 “민법이 규정하는 부부간 동거 의무, 협조 의무, 부양 의무, 정조 의무 등은 준수하지 않기로 부부 쌍방이 약정을 했더라도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컨대 ‘바람을 피워도 탓하지 않는다’거나 ‘돈을 많이 주면 술 먹고 구타해도 신고하지 않는다’ 같은 상식과 인륜에 반하는 내용들이다. 폭행, 상해 등 범죄행위를 면책하는 내용은 안 된다고 이해하면 쉽다.
행동 자유권을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제한하는 조항들도 법률에 반할 소지가 있다.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다거나 밤 10시 이전에는 무조건 귀가해야 한다거나 하는 조항들은 부부간 분쟁만 증가하고 실익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서 변호사는 재산분할을 포기하거나 아이를 보지 않겠다며 면접교섭권을 포기하는 것도 법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벌가에서는 면접교섭권 박탈이 흔하지만, 재산분할권과 더불어 법이 포기할 수 없는 권리, 즉 고유권으로 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서 변호사는 “혼전계약서는 이혼소송을 할 때 부부가 중요한 원칙, 가치로 생각했던 것들을 입증하고 혼인파탄의 책임 사유를 가릴 때 좋은 증거자료가 된다”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오랜 시간 협의해서 잘 써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재산과 관련된 계약은 공증, 등기 등을 통한 제3자 공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변호사 입회 하에 써야만 효력을 인정 받는다.
혼전계약서는 무엇보다도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작성돼야 계약내용이 오래 유지될 수 있다. 일방에게 과도하게 유리한 것이 사랑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불리한 조항은 처음 얼마간은 지켜질지 몰라도 결혼 생활 내내 관철되기란 불가능하다. 합리적 조정을 위한 장치도 그래서 필요하다. 서 변호사는 “혼전계약서는 이혼 가능성과 무관하게 당사자간 지켜야 할 혼인생활의 원칙”이라며 “협상을 거쳐 정기적으로 갱신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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