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0년대 초, 아카드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50년)이 아카드어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아카드어는 못과 같이 생긴 글자로 지금의 이라크지역에서 기원전 26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사용된 쐐기문자다. 함무라비 법전 아카드어는 글자 자체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암호와 같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함무라비법전을 많은 관광객이 본다. 그러나 그들은 깨알같이 쓰인 신기한 글자들 앞에서 장님이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읽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하루에 서너 시간을 들여 아카드어 공부에 매진했다. 쐐기문자를 하나하나 여러 번 습작하고, 어휘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니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오랜 아카드어 공부 수련이 없었다면, 나는 아카드어 장님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어휘와 문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오늘 시점에서 ‘어제의 나’는 장님이다. 내일 시점에서 ‘오늘의 나’ 또한 장님이다. ‘과거’라는 시간은 나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장님으로 만드는 괴물이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오늘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오늘 볼 수 없는 것들도 내일이 되면 새롭게 볼 수 있기를 간구한다. 시간은 우주의 숨어있는 진실을 조금씩 알려주는 재판관이다. 그러나 아무한테나 이런 시간이 오지 않는다. 내가 어제와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면, 나는 ‘장님상태’에 머무른다. ‘장님상태’에 머물면서, 자신이 세상을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마음을 오만(傲慢)이라고 부른다. 내게 편하고 익숙한 ‘오만’이라는 공간은 동시에 바깥세상을 차단한 장막과 같다. 이곳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출하지 않는다면, 나는 ‘장님’이다. 내가 어제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력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어제의 나의 삶을 규정했던 법칙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위다.
내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소설이 있다. 포르투갈 소설가 호제 사라마구가 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원제는 ‘맹목에 관하여’다. 이 소설의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파란불이 마침내 켜져 차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그러나 모든 차가 재빨리 정지선을 떠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중간 차로 맨 앞에 있던 자동차가 멈췄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분명히 기계적인 결함이 있거나, 가속 페달이 풀렸거나 변속 레버가 잠겼을 것이다. 혹은 서스펜션이나 브레이크가 망가졌거나 전기회로 고장일 것이다. 이런 일이 한두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행인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가다 서 있는 자동차 운전자를 보고 윈드실드에 대고 팔을 흔든다. 뒤에 있는 차들은 마구 경적을 울린다. 몇몇 운전자들을 정체된 차를 옮기려고 차에서 내려와 닫힌 창문을 미친 듯이 두들긴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들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이쪽저쪽. 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소리치고 있다. 그의 입 모양을 보아 판단하면 그는 몇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한 단어가 아니라 세 단어 같다. 누군가 차 문을 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장님입니다.”
장님이 된 그는 ‘친절한 낯선 자’를 만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차 절도범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 차 절도범도 장님이 된다. 그는 안과의사에게 간다. 그는 의사에게 자신이 보는 색은 검은 색이 아니라 찬란한 흰색이라고 말한다. 의사는 그의 눈에서 증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의학 교과서를 뒤졌지만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책들을 책장에 다시 꼽아 놓는다. 그도 곧 장님이 된다. 병명이 없다. 등장인물도 이름이 없다. 이 병은 전염병이 되어 온 도시에 퍼진다. 정부는 감염된 자들을 도시 밖 한 곳에 수용한다. 이 수용소는 생존을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이 된다.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그들의 고유한 목소리다. 누가 장님인가. 장님이 전염병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 소설의 마지막에 ‘흰색 장님병’ 전염이 줄어들다. 이 소설에서 장님병이 감염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의사 부인은 인간들의 진상들을 목격했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왜 장님이 되었는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언젠가 알게 되겠죠.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 볼까요? 나는 우리가 어느 순간에 장님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님이었습니다. 볼 수 있는 장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맹목(盲目)이라는 병에 걸렸다. 한자 ‘맹’(盲 )은 ‘망할 망’亡과 ‘눈 목’目의 합성어다. ‘망’(亡)은 무지와 무식이라는 후미진 곳에 숨어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과거라는 괴물의 포로가 되어, 자신을 장님으로 만든 주범이다. 내 눈에 쓰인 무지의 껍데기를 뗄 방법은 무엇인가. 내 삶의 새로운 삶의 어휘와 문법은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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