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국민 성장’ 얘기하는 데… 야권 실패는 ‘분배’ 해법 없기 때문
복지는 근본적인 노동자 몫 키워 주는 것… 노동과 공정 세금이 화두 돼야
개헌은 시민 중심으로 추진… 새로운 공화국 상 만들어 가야
개혁보수신당 집행유예 기간, 면죄부 주어진 것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질 수 없는 선거를 패배한 이후 지난 4년 간 진보진영은 무기력을 거듭했다. 박근혜정부의 폭주를 견제하기는커녕 내부 분열로 싸우기만 했다. 국민이 준엄한 심판자로 나서 4ㆍ13 총선에서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고, 개혁 입법은 요원했다.
지난 달 27일 만난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난독증과 무능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의 보수가 반공주의에 기댄 가짜 보수였듯, 진보 역시 ‘철학 없는 가짜 진보 행세’만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손 교수와의 인터뷰는 두 차례 진행됐다. 처음에는 진보 진영이 바라보는 보수의 몰락 원인과 대안에 대한 당부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보수만큼이나 진보 역시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진보의 과제를 다시 묻게 됐다. 손 교수는 인터뷰 내내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아도 걱정이라고 했다. ‘야당 표 헬조선’이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바꿀 만한 준비가 됐는지 자성해 보라는 일갈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정을 견제해야 할 야권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본적으로는 지난 4년간 박근혜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충실히 제어하지 못한 것 자체가 문제다. 무능했고, 심지어 전투 의지도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노무현정부 당시의 ‘박근혜 야당’이 야당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했다. 사학법 개정 등을 4대 악법이란 딱지를 붙여 정부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끝내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시켰다. 지금 야당은 여당에 가까운, 자기 밥그릇에 연연하는 ‘생계형 자영업자 정치인 연합’이라고밖에 생각 안 된다.”
-촛불 민심은 처음부터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원했고 탄핵을 촉구했다. 그러나 야권은 정국을 질서 있게 수습하기는커녕 우왕좌왕했다.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는데도 국회는 서로 눈치를 보느라 주어진 권한을 즉각 행사하지 않았다. 특히 무능한 야권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체제다. 황교안 대행은 야권이 청문회에서부터 문제를 삼았던 인물인 데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국민의당은 더불어민주당이 내놓는 총리 후보가 싫고, 민주당은 국민의당이 추천하는 총리 후보가 싫었던 거다. ‘상대당의 총리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박근혜정부가 임명한 황교안 체제를 이어 가자’는 정파주의적이고 소인배 같은 사고 방식이 현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들은 촛불 정국에서 광장에 나가 이른바 사이다 발언 등을 쏟아내는 데만 앞장섰다.
“그분들은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는 게 먼저였다고 본다. 특히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2012년 대선 패배의 책임이 있는 분들 아니냐. 본인들이 잘 못해서 질 수 없는 선거에 패배해 국민께 이런 고통을 안겨 드려 죄송하다, 정권 출범 이후에도 제대로 막지 못했다며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촛불민심에 편승해 무임승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4ㆍ13총선에서 국민은 여소야대를 만들어 줬지만, 기대에 부응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진보진영은 무능과 함께 자기 철학이 없는 게 문제다. 제대로 된 철학이 없으니 현실 진단부터 잘못되고, 내놓는 대안도 적합하지 않았다. 당장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정세균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는 성장을 골자로 하는 ‘뉴민주당 플랜’을 들고 나왔다. 문재인 전 대표도 지금 국민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더 이상 성장에서 해법을 찾아선 안 된다. 진보진영이 무능했던 분야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였다. 제대로 된 분배 해법을 제시하지 못해서 연거푸 대선 승리에 실패한 거다. ‘헬조선’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을 찾지 않은 채 본인들이 좌파라 생각하고, 우경화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새누리당 보고 가짜 보수라고 하는데 여기도 가짜 진보다.”
-촛불민심을 받들기 위해 야권에서 착수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무엇인가.
“크게 적폐 청산과 진정한 대의민주주의의 회복이다. 먼저 우리 사회의 낡은 유산인 정경유착 고리를 끊기 위해 재벌개혁, 검찰개혁 등에 나서야 한다. 핵심은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다듬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질 좋은 대의민주주의가 기능하도록 정치개혁이 뒷받침돼야 한다. 외국 교수들이 한국의 촛불집회와 길거리 농성 등을 보고 거리의 정치가 일상화됐다며 부러워하는데 이는 단언컨대 한국 정치의 실패다. 거리의 정치가 없어지는 게 최고의 대의민주주의다. 이를 위해 정당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 수를 연동시켜 배분하는 독일식 선거구제 개편에 착수해야 한다. 대선 결선투표제는 야권은 물론 여권도 나눠진 4당 체제에선 도입하기에 적기다. 선거 연령을 18세로 낮추고,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등도 필요하다.”
-새누리당에서 개혁보수신당이 떨어져 나오는 등 보수 진영 재편이 일어나고 있다. 개혁보수신당에 대해 야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새누리당은 낡은 반공에 기댄 수구정당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받들며 아무 비판도 못하는 한마디로 ‘내시 정당’이었다. 야권은 비판과 연대라는 양면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먼저 개혁보수신당도 박근혜 정권 창출과 공동 운영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불러온 죄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과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할 수 있도록 야권은 끊임 없이 비판하고 계속 요구해야 한다. 또 미래지향적으로 개혁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같이 할 수 있도록 연대하는 것이다. 이 같은 채찍질로 보수세력의 세대교체를 야권이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혁보수신당이 얼마만큼 변화의 모습을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개혁보수신당은 아직 사죄 세탁 과정에 있다. 일종의 집행유예 기간으로 완전히 면죄부가 주어진 게 아니다.”
-보수진영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야권 재편도 필요하지 않나.
“일단 야권 분열을 막아야 한다. 과거 1987년 6월 항쟁 이후 야권의 분열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비극을 시작으로, 야권은 늘 분열이 문제가 됐다. 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이 따로 가야 할 만큼 이념적 색깔이 다른 정당인지는 의문이다. 문재인과 안철수 개인의 정치적 반목과 정치 욕심 때문에 갈라진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야권 통합 얘기가 나오는데, 결선투표제 도입이 가장 쉬운 방식이다. 촛불 국민경선이나 야권 후보를 ‘원샷’으로 내는 방안 등 다양한 고민이 필요하다. 작은 기득권 때문에 매몰 돼 역사의 죄인이 돼선 안 된다. 누구 말마따나 촛불에 타 죽지 않는 방법이다.”
-개혁보수신당이 진정한 보수 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공주의라는 이름 하에 안보를 지키겠다고, 개인의 자유를 얼마든지 침해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게 수구세력이었다. 개혁보수신당은 이 같은 과거의 유신시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민주화 등 경제적 진보를 갖고 과거와 차별화하려고 하는데, 맞지 않다. 그건 박근혜정부도 내세웠던 거 아닌가. 정치적 자유, 표현 결사의 자유 등을 지키는 게 진정한 안보이자 보수다.”
-개혁보수신당도 경제민주화를 얘기하고 복지확대를 주창하며 ‘좌클릭’하고 있다. 야권이 내세워야 할 시대정신은.
“거듭 강조하지만 진보진영이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성장에 무능해서가 아니라 분배에 무능해서 집권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성장만을 얘기하고, 어떻게 분배 문제를 개선할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 없는 복지’였다. 복지를 자꾸 재분배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처음부터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키워 주는 게 먼저다. 이번 대선에서 야권은 노동과 공정한 세금을 화두로 들고 나와야 한다. 공정한 세금 기준을 정해, 있는 자가 내게 만들고,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제대로 보상받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핵심이다. 지금까지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유지해왔다면, 이제는 소비자, 국민 노동자 등 이해당사자들이 공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로 이동해야 한다.”
-야권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데.
“워낙 질 수 없는 선거를 져 온 터라 모를 일이다. 안 되면 이상하지만, 안 될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가 걱정이다. 당장 김대중ㆍ노무현정부 공히 ‘노동자의 경영 참여 보장’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끝내 실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헛다리를 짚고 있는 상황에서 ‘야당 표 헬조선’은 계속될 것이다. 분열에 의한 패배도 두렵지만, 시대정신을 못 읽는 야권의 난독증과 무능이 결합돼 ‘바꿔봐야 별로 소용 없다’는 냉소주의가 이번 대선을 지배할까 두렵다.”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지고 있는데, 바람직한 방향은.
“개헌은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제7공화국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접근해야 한다. 무조건 다음 대통령한테 맡기자고 하면 그들만의 리그, 야합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어떤 방식이든 정치권보다는 시민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 개헌이란 명칭보다는 ‘우리가 살고 싶은 새로운 공화국 상’을 목표로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이를 정치권에 압박하는 2단계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선과 연계시켜, 이런 대안을 공약으로 받아들이는 세력을 지지하겠다고 압박하고, 후보들은 이를 약속하고 차기 정권에서 수행하는 거다.”
-촛불민심이 원하는 지도자상은. 또 야권에 마지막 당부의 말은.
“어찌 보면 국민의 기대치가 매우 낮아진 거 같다. 정의로운 지도자를 바라기는커녕 최소한 부정의 하지 않은 지도자를 원하는 수준으로 기대감이 떨어진 것 같다. 2016년 촛불항쟁은 87년 6월 항쟁과 달리 그야말로 전 국민적 운동이었다. 6월 항쟁에는 군사독재 저항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특수 과제가 있었던데 반해, 이번에는 민주화 이후 30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20년에 대한 분노이다. 야권은 사즉생(死則生)의 정신으로 시대적 요구를 감당해야 한다. 지금 야권에 큰 정치인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 모든 걸 버릴 때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촛불 혁명을 이어 가야 한다.”
강윤주기자 kkang@hna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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