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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찢겨진 공동체의 치유

입력
2017.03.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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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시민’과 ‘태극기 국민’의 분열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는 말처럼

진보 정권도 국민통합 과제는 같아

학교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친다. 지난 6년 동안 매 학기 한번쯤 받는 질문의 하나는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강의 시간에 보수와 진보는 공동체를 모두 중시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공동체는 보수의 가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례로 ‘둘로 나뉜 국민(two nations)’을 ‘하나의 국민(one nation)’으로 통합하려 했던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들곤 한다.

몇몇 학생들은 이의를 제기한다. 공동체가 정말 보수의 가치냐는 질문이다. 그들의 시선에 잡힌 보수의 이념은 사회적 강자의 기득권 옹호라는 이기주의에 놓여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라는 공동체주의는 외려 진보의 이념이 아니냐는 반론이다. 그러면 나는 두 가지를 얘기한다. 내가 말한 공동체에 대한 강조가 서양의 19세기에 계몽적 진보주의에 맞선 고전적 보수주의의 이념이라는 게 그 하나다. 그리고 한국 보수의 경우 이런 전통과는 달리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흔히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게 다른 하나다.

이러한 나의 답변에 수긍하는 학생도 있지만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념과 현실의 거리로 응답을 이어간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대표적 보수담론이 박세일 교수의 ‘공동체 자유주의’인데, 공동체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를 동시에 중시하는 이 담론이 현실에서 정책으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공동체 자유주의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강령에 담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9년 간 보수 정부들이 주력한 것은 공동체와 무관한 4대강 사업 같은 개발주의 정책과 규제 완화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고 덧붙인다.

공동체에 대한 한국 보수의 정치적 상상력 빈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둘로 나뉜 현실과 이 현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의 고민과 대안이다. 지금 한쪽엔 귀속된 지위가 성취된 지위보다 우세한 ‘세습 자본주의’의 수혜계층이, 다른 한쪽엔 최저임금 수준으로 살아가야 하는 ‘경쟁 자본주의’의 노출 계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경제 영역뿐만 아니다. 시민사회에서도 공동체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 시민’과 그런 대통령을 지키려는 ‘태극기 국민’으로 분열돼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로 상징되는 사회통합 또는 국민통합이 다음 정부의 매우 중대한 과제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해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5월 초면 새 정부가 출범한다. 지난 몇 개월의 흐름으로 보아 진보 정부일 가능성이 큰데, 그렇다면 이제 보수 정치세력이 아닌 진보 정치세력이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새롭게 일궈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통합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아가 이념적으로 과도하게 분열된 우리 사회를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 지난 30년의 민주화 시대를 돌아보면 ‘보수의 대한민국’과 ‘진보의 대한민국’ 간의 갈등이 너무 커졌다. 또한 현실정치 차원에서도, 다음 정부는 여소야대 상태로 출범할 터인데, 통합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집권 초반부터 국정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통합을 이루기 위해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다른 세력에 대한 포용이다. “진정 곧은 것은 굽어 보이고, 길은 본래 꾸불꾸불하다.” ‘노자’에 처음 나오는 이 말은 사마천이 ‘사기 열전’에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경구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의 하나는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을 일구는 데 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선 때론 꾸불꾸불한 길을 가야 한다. 문재인이든 안희정이든, 아니면 안철수든 이재명이든, 하나의 대한민국을 이루고 싶다면 찢겨진 공동체를 치유할 정치적 상상력과 실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간절한 소망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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