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골목과 한옥에서 차분한 정취 느껴져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이색적인 전시장 많아
김상헌, 정선 등 역사 인물의 집터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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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주말마다 촛불이 밝혀졌던 경복궁 부근에는 날이 따뜻해지면서 나들이객이 부쩍 많아졌다. 경복궁 서쪽의 서촌에도 골목골목 마을을 구경하고 차 마시며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찾고 있다. 같은 서촌 권역이라도 동네에 따라 분위기가 조금씩 다른데 자하문로와 경복궁 사이의 통의동-창성동-효자동 그리고 청운동 지역은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차분한 곳이어서 조용히 골목을 걸으며 마을의 역사와 사건을 살필 수 있다.
● 스러진 백송, 전시공간으로 변신한 보안여관
통의동의 상징은 백송이다. 이름대로라면 몸체와 줄기, 가지까지 모두 하얀 소나무가 떠오를 테지만 실제로는 줄기만 회백색이고 나머지는 일반 소나무와 같다. 흔히 통의동 백송이라 부르는 이 나무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을의 자부심이었다. 서울 중심부 주택가에 수령 600년 나무가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백송은 1990년 돌풍에 쓰러지고 만다. 노태우 대통령이 살려내라 엄명하고 회생대책위원회까지 꾸렸지만 백송은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렇게 죽은 백송은 지금 밑둥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다 베어진 상태다. 다행스럽게도 후손 백송 몇 그루가 이곳에서 자라고 있으니 수백 년이 또 흐른 뒤 우람한 백송이 다시 마을의 상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어본다.
살아있을 당시 백송은 키가 16m를 넘었다. 그렇게 큰 나무가 뿌리와 가지를 뻗으려면 꽤 넓은 터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백송이 있는 자리에는 조선시대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이 있었다. 미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이복형과 목숨을 건 왕위쟁탈전을 했을 영조의 젊은 날을 이 백송이 지켜보았을지 모르겠다.
백송 부근 골목에는 누가 썼는지 짧은 글 몇 편이 적혀있다. 담장 글이 대개 유치하고 민망하지만 이 글은 “문전옥답 태평양 바다 놔두고 별 따러 서울 왔지만 제 이름 석자 지키기도 참 힘들다”처럼 세상사의 고단함을 담고 있다.
백송 밑둥이 남아있는 좁은 길을 나와 오른쪽으로 걸으면 대림미술관이 나온다. 통의동 일대에 개성 있는 갤러리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대림미술관은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미술관을 지나 효자로에 다다르면 건너편으로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이 보인다.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建春門)과 짝을 이루는 영추문은 이름처럼 가을을 맞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해가 뜨는 동쪽은 봄을 상징한다고 해서 건춘문이고 해가 지는 서쪽은 가을을 의미하니 영추문이다. 가까운 곳에서 태어난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연추문(延秋門) 들이달아 경회남문 바라보며”라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연추문이 바로 영추문이다. 영추문은 원래 지금보다 50m 정도 남쪽에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낸 전찻길로 전차가 다니면서 그 진동으로 경복궁 담장과 영추문이 무너진 것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영추문 맞은 편의 보안여관은 목욕탕 표시를 한 간판을 아직 달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과객이 묵었던 이 여관은 10여 년 전부터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동리 서정주 오장환 등 ‘시인부락’ 동인들이 묵으며 문학과 현실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작가와 시인들이 장기투숙하며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기웃하거나 신춘문예를 준비했다는 말도 있다. 여관 이름을 왜 보안이라고 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좁은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방이 배치돼 있다. 그러나 문짝이 뜯어지고 벽지가 벗겨진 데다 철근 뼈대까지 드러나있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 그런 곳에서 이뤄지는 전시라니 색다르기는 하다.
이곳 통의동은 평지가 널게 펼쳐져 있다. 작은 골목이 끊일 듯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기와지붕 한옥과, 1970년대에 지었을 것 같은 마당 넓은 단독주택이 보인다. 요즘은 작은 연립주택까지 뒤섞여 있다. 찻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조용해지는 동네인데 어느 새 그런 틈까지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와 있다. 건축사무소, 게스트하우스도 늘어나고 있다. 골목의 정취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마을을 걷는다.
● 김재규가 박정희 총 쏜 안가는 무궁화동산으로
자하문로와 효자로를 동서로 가르는 자하문로10길을 건너 올라가면 창성동이다. 창성동도 통의동과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카페나 음식점이 적어서인지 조금 더 조용하다. 아슬아슬 이어진 골목을 걷는 재미도 여전하다. 단 주택가이기 때문에 너무 떠들어 주민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
창성동 북쪽이 효자동이다. 골목을 걷다 보면 해공 신익희 선생의 집이 나온다. 경기도 광주 출신인 신익희가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1954년부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선거 유세 도중 갑자기 숨진 1956년까지 1년 9개월 동안 머물던 집으로 1930년대 도시형 한옥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만나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북쪽으로 발걸음을 마저 옮기면 오른쪽으로 청와대가 보이고 정면으로 무궁화동산이 나온다. 무궁화동산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일어난 곳이다. 이곳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공원으로 조성했지만 역사의 현장이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약간 아쉽다. 공원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네 꼬마들이 이곳 무궁화동산과 건너편 청와대 분수대 앞 광장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 척화론자 김상헌과 화가 정선이 살던 집
무궁화동산 안쪽에는 청음 김상헌의 집터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로도 유명한 그는 조선 중기 척화의 상징이다. 또한 이곳 서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세도정치의 대명사였던 안동 김씨가 김상헌과 그의 형 김상용에게서 사실상 출발했는데 형제와 그 후손들이 바로 서촌에서 살았다. 조선을 문란하게 만든 세도정치의 주역이자 현실을 도외시한 척화론의 주창자이니 서촌을 걸을 때 그들의 생각과 삶을 떠올리며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무궁화동산까지 왔다면 길 건너 경복고등학교 안으로도 들어가 보자. 한때는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학 입시 성적을 낸 이 학교에는 조선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집이 있었다. 정선은 이곳에 살면서 김상헌의 후손인 김창흡, 김창업과 가까이 지냈다. 학교에서 정선의 집터를 발견했다면 그가 그린 인왕제색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인왕산을 바라볼 차례다. 눈에 보이는 인왕산과 그림 속 인왕산이 얼마나 닮았는지, 정선이 그림에서 무엇을 강조했는지 생각해볼 시간이다.
경복고등학교에는 나무와 꽃이 많다. 600살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를 비롯해 60종 이상, 880그루 이상의 수목이 있기 때문에 수목원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꽃과 나무에 관심이 있다면 계절마다 들러서 관찰하면 좋겠다. 물론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방해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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