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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유학생 선언

입력
2017.07.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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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면 제3세계 공항에 떠도는 유령

영어 때문에 겪게 마련인 후천적 수줍음

넓은 지식시장 향해 당당하게 걸어가라!

매년 이맘때면 제3세계 공항에는 유령이 배회한다. 유학생이라는 유령이. 이들이 잃을 것은 자존심이며, 얻을 것은 신비한 수줍음이다. 일찍이 원정출산을 당하지 않아 뒤늦게 해외에 나가게 된, 이 후천적으로 수줍은 이들이여 단결하라!

미국에서 유학을 한다고 하면,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발랄하여 양인(洋人)들 하고 오순도순 지내다 귀국하는 줄 아는데, 그것은 큰 오해이다. 제3세계 늦깎이 유학생에게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해지는 날은 쉽게 오지 않는 법, 양인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수줍은 유학생, 교환교수들이 허다하다. 나 역시 나이 서른이 가까워 처음 가본 미국에서 누군가 “How are you?(상태가 어떠냐?)”라고 인사하면, 중학교 때 배운 대로 “Fine. Thank you. And you? (좋아. 감사해. 네 상태는?)”라고 말하며 신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유학생은 제국의 중심부를 겉돌기 마련. 그런 면에서 보자면, 힘든 점은 있어도 졸업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게 된 것은, 탈(脫) 유령의 좋은 기회였다고 하겠다. 미국 대학 행정의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동료로 일하면서 양인들의 생활습관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제국의 언어로 강의를 하다 보니, 제국어 실력도 경미하게 나아졌다. 학생이 등교 길에 발랄하게 “How are you? (상태가 어떠쇼?)”라고 인사를 하면, 동양의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Just existing (나는 존재할 뿐이다)”이라고 수줍게 대답할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학부모가 학교를 방문해서 자기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할 때는 난감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다고. 차라리 그 생면부지의 미국 아주머니에게 내 고충을 토로하고 싶다. 나두 잘 모르겠시유... 난 할 수 없이 신비하고 수줍어유... 나두 help(도움)가 필요해여… 흑흑.

직장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학교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고, 시범 강연을 하고, 간담회를 가질 때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줍은 동시에 사교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근처 그랜드 캐년 비슷한 골짜기를 구경시켜준다며, 자기 차에 날 태우고 두 시간 넘게 컨트리 뮤직을 반강제로 듣게 만든 미국 중서부 주립대학 털보 학과장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미국 사회에 큰 무리 없이 적응하고 있는 수줍은 동양인처럼 보이고 싶은 나머지, “그 놈의 컨트리 뮤직 시끄러우니 꺼!”라고 냅다 대꾸해 주지도 못하고 내내 참고 듣고야 말았던 것이다! 입에 풀칠하고 살기 힘들기는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여... 이 컨트리 뮤직 트라우마 때문에, 이 대학의 초빙제안은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악의 기억은 학위 받기 얼마 전, 마스코트 역할을 한 것이었다. 9월 새 학기 등록일, 돈 몇 푼 벌어보자고, 사자 인형 가죽을 뒤집어쓰고, 등록처에서 학생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지분거리면서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날은 더워서 땀은 삐질삐질 나고… 먼 타향에서 성격에 반하는 일을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한 때 논어를 외우고 살던 신비한(?) 동양의 선비가 양인들 기쁨조를 하면서 밥을 벌어먹어야 하다니… 이 악몽의 정점은, 내가 사자인형 가죽 아랫도리 앞뒤를 뒤바꿔 입는 바람에, 꼬리를 엉덩이가 아닌 정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한동안 그 짓을 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아무리 사자의 양물이기로서니 그처럼 길고 클 수야 있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으며 뒤로 넘어 가길래, 그저 내가 마스코트 노릇을 의외로 꽤 잘 하나보다 생각했다... 흑흑.

유학생이 잃을 것은 제 3세계 갑질 교수의 쇠사슬이며, 얻을 것은 난데없는 신비함과 보다 넓은 지식의 시장이다. 학문의 식민성과 국수주의가 함께 사라지는 그날까지, 만국의 수줍은 유령들이여 단결하라! (Shy Ghosts, Unite!)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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