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김원중의 고전산책] 자공(子貢) 같은 협상의 귀재는 없는가

입력
2017.07.24 14:25
0 0

<논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의 표본처럼 거론되는 자공은 말만 앞세우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판단과 유연한 사고력을 갖춘 협상가요 외교관이었다. 물론 그는 스승 공자를 예우하고 정성껏 챙긴 제자였으며, 공자가 안회와 비교해서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을 때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공야장(公冶長)’편)라고 하면서 겸손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이 “자공은 (유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만을 모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했다.”(<사기>’중니제자열전’)고 한 평가가 말해 주듯 그는 유가 아닌 유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뛰어난 두뇌회전으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서 정치적 위상도 확고했던 그를 왜 협상과 외교의 귀재로 평가하는가? 약소국 노나라는 서쪽에는 진(晉), 동쪽에는 제(齊), 남쪽에는 오(吳)ㆍ월(越) 등 사방의 열강에 둘러싸여 늘 핍박당하는 기구한 운명의 나라였다. 이웃 제나라 대부 전상(田常)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힘이 좀 부족하자, 당시 제나라의 호족인 고씨(高氏) 등과 함께 자신의 노나라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게 된다. 공자가 “나라가 위태로우니 누가 나서서 구하겠는가?”라고 하자, 자로(子路)와 자장(子張)과 자석(子石) 등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했으나, 공자는 자공을 추천하게 된다. 자공의 협상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자공은 먼저 전상을 찾아가 성벽도 낮고 위선적이고 무능한 신하들 일색인 형편없는 노나라를 치지 말고 성벽이 높고 병사들도 용감하여 공격하기 어려운 오나라를 치라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툭 던진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대체 이런 일반 상식과 반대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전상에게 자공은 이런 논리를 피력한다.

“제가 듣기에 나라 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강한 적을 공격하고, 나라 밖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약한 적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골칫거리는 나라 안에 있습니다. 저는 제나라 왕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봉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이뤄지지 않은 것은 대신들 가운데 반대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노나라를 쳐서 제나라 땅을 넓히게 된다면 제나라 왕은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더욱 교만해질 것이고, 대신들의 위세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과 사이가 날로 소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나라를 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백성은 나라 밖에서 죽고, 대신들은 나라 안에서 그 지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위로는 대적할 만한 강한 신하가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니, 왕을 고립시켜 제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게 됩니다.”(<사기>’중니제자열전’)

아무 공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리수를 두어 패착을 초래하기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서 권력을 차지하는 어부지리 전략을 취하라는 논지에 전상은 감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전상의 군대가 노나라를 치려고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자 자공은 군대를 잠시 붙들어 놓으라고 하면서 그 사이 자신은 오나라로 가서 오왕을 설득하여 노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하겠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오왕 부차를 만난 자공은 제나라가 노나라를 끌어들여 오나라를 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부차로부터 “월나라를 칠 때까지 기다려 주면 그대의 말을 따르겠다.”는 답변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그는 곧장 “고통이 뼛속까지 사무쳐 밤낮으로 입술은 타들어 가고 혀는 마른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찬 월왕 구천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은 때가 아니므로 훗날 기회를 노리라고 하면서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여, 오왕이 월나라의 보복의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제나라를 정벌에 나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나라가 제나라 정벌에 성공하면 오히려 노나라에 큰 위협이 느낀다고 판단한 자공은 다시 진(晉)나라로 달려가 정공(定公)을 만나 오나라가 제나라를 이길 경우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측을 제시하면서 군대를 잘 정비하고 대비하라는 조언했다. 자공의 예상대로 오왕이 제나라와의 승리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하자, 그 틈에 월왕도 오나라를 습격하니 오왕은 결국 진퇴양난에서 대처하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지고, 월왕은 동방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노나라의 사직은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사마천은 자공의 외교력을 극찬하여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중니제자열전’)고 했다.

자공 단 한 명의 외교역량으로 다섯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만큼 파괴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자공은 유가였고, 공자를 사두마차에 태우고 다닌 제자였지만 그는 명분이나 이상을 내세우지 않고 엄존하는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판단했다. 오직 사직보존이라는 실리만을 추구한 그의 외교역량이 평가 받을 만한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