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보수 시장주의자’들이 타칭 ‘진보 정부’를 두고 ‘제대로 된 성장 전략을 내놓으라’ 두들겨 댈 때면 참 묘한 기분에 사로 잡힙니다. 분배에 ‘힘쓰면’ 나쁜 정부지만, 성장에 ‘힘쓰면’ 좋은 정부가 되는가 봅니다. 보수 시장주의자라면 뭐가 됐던 여하간 ‘힘쓰는’ 정부란 무조건 나빠야 할 텐데요. 하기야 우리가 언제 ‘논리적 일관성’을 중시했나 싶습니다만.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경제학자 스티븐 코언과 브래드퍼드 펄롱이 함께 쓴 ‘현실의 경제학’은 이 문제를 파고 듭니다. 원제 ‘Concrete Economics: The Hamilton Approach to Economic Growth and Policy’가 문제의식을 더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현실에 뿌리 박은 단단한 경제학이란 다름 아닌 ‘해밀턴식 접근법’이란 얘깁니다.
네, 맞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1인이자 재무장관을 지냈던 알렉산더 해밀턴입니다. 지금은 또 다른 거물 토머스 제퍼슨에 가려져 잊혀진 인물이 됐지만, 알고 보면 힘깨나 쓰는 연방정부를 주장했던 해밀턴식 접근법이 미국의 성장에 더 큰 기여를 했다고 논증하는 게 책의 요점입니다. 동시에 해밀턴식 접근법이 미국 역사에 어떻게 면면히 이어졌는지도 밝힙니다. 미국에도 “힘쓰는 정부는 곧 악”이라 외치는 보수 시장주의자들은 많으니까요.
저자들이 나열하는 인물 중 특히 눈에 띄는 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입니다. 아이젠하워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2차 세계대전의 영웅’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나온 아이젠하워 관련 책은 주로 군인으로서의 리더십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쪽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보수 시장주의자들을 배신한 아이젠하워’를 다룹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이젠하워 이전엔 4번 연임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 뒤를 이은 해리 트루먼의 민주당 정권이 1933년부터 1953년까지, 무려 20년을 집권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찬성론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이 거대 토목사업이기만 한 것처럼 왜곡했습니다만, 뉴딜은 그 외에도 노동관계, 복지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작업이었습니다. 보수, 시장을 읊어대던 공화당 매파는 아이젠하워라는 전쟁영웅의 권위에 기대어 빨갱이 냄새 풀풀 나는 이 20년의 세월을 뒤집고 싶어했습니다. 때는 냉전이었으니 소원 성취는 손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젠하워는 ‘보수’ 혹은 ‘시장’이란 이름의 급격한 뒤집기를 거부합니다. “어떤 정당이라도 사회보장과 실업보험을 폐지하려 든다거나, 노동법과 농장 지원 프로그램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 정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친형에게 밝힌 속내입니다. 저자들은 재무장관 해밀턴의 이름이 미국인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진 것만큼이나 아이젠하워의, 합리적 보수의 얼굴이 잊혀진 것 또한 안타까워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적 곤궁은 이 망각 때문이라 봐서입니다.
진보정부의 약점은 경제라고 생각해선지, 걱정해준다는 핑계로 ‘말리는 시누이’ 마냥 밑도 끝도 없는 위기론과 경제무능론과 관치(官治) 논란을 반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을 것 같습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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