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이 5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소설이, 좋아하는 신문의 좋은 상을 받게 되어 내 일처럼 기쁘다. 나는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지인에게 선물했고, 강연하며 추천했고, 서평을 써서 기고하기도 했다.
‘피프티 피플’은 어느 지방도시 병원을 중심으로 51명의 삶을 각각의 시점에서 그린다. 의사, 간호사, MRI 기사, 보안요원, 응급헬기 조종사, 홍보담당 직원, 환자, 카페 주인…… 조금씩 착하기도 하고 간혹 나쁘기도 한, 대체로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런저런 사연을 품고, 너무 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사소하지도 않은 사건을 겪고, 웃고 울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간다.
다채롭고 매력적인 군상 중 두 인물에게 각별히 마음이 갔다. 병원에서 자기 역할은 ‘권위 있는 할아버지 마스코트’라고 여기는 70대 의사 이호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라고 자주 웃는 유통사업가 진선미다. 두 사람에게 눈길이 간 이유는 책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와는 큰 관련이 없다. ‘나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이렇게 늙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넬슨 만델라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솔직히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한참 눈을 낮춰 국내외 유명인사들을 살펴도, 그렇게 살 수 없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공을 무조건 우러르고 본받을 일도 아닌 것 같다. 대성공을 거둔 이들은 대개 실력도 있었지만, 인생에 한두 번 운도 엄청나게 좋았다. 그런 운을 부러워할 수는 있겠으나 따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폄하하거나 질시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능력이 뛰어나고 노력도 충분히 했는데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아 실패하는 사람도 많다. 인간은 모든 걸 예상할 수 없으니까. 애초에 능력이라는 것도 절반 정도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하는 운의 영역 아닌가 싶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눈을 확 낮추면 ‘40대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유의 생활형 조언들이 있다. 노래방 가지 마라, 오빠 소리에 흔들리지 마라, 멘토 놀이 하지 마라, 문자메시지 보낼 때 맞춤법 틀리지 마라…….
뭐, 참고는 한다. 몇몇 권고는 무시한다. ‘서태지 김광석은 잊으라, 이제 와서 외국어 학원 다니지 마라’ 같은 얘기들. 스무 살 무렵 듣던 록 음악 계속 듣고 영어공부 틈틈이 하며 늙어가겠다. 이 ‘하지 마라’ 목록의 상당수는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법이 아니라, 체면을 지키는 법에 대한 내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특히 젊은이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듯해 살짝 안쓰럽기도 하다. 서태지 김광석을 왜 잊어야 하지? 늙다리로 보일 것 같아서?
“나이 들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금언(?)도 같은 과다. 주변 평판이라는 무형의 재화를 가격 대비 성능비 높게 구매하는 방법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평판이 꼭 필요하므로 유용한 요령이라 여기고 가끔 실천한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평판이지 존경이 아니며, 존경이라 한들 부질없다. 칭찬이 목표가 되면 부모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되고 인기가 목표가 되면 리액션이 좋은 다수에게 아부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중심을 잃는다.
가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 내가 하고 다니는 이야기를 스무 살 장강명이 듣는다면, 그 녀석은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세울 것 같다. 그리고 스무 살에는 그러는 게 낫다. 서른 살 장강명이라면 어쩌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서른 살 장강명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고민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냥 그 정도 아닐까? 다양한 길이 있고, 어느 길이 옳은지 모른다. 누구는 구원을 쫓고, 누구는 진리를 탐구하고, 누구는 영원이 될 완전한 순간을 추구하며, 누구는 세상을 바꾸려 하고, 누구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이야말로 진정 값지다고 믿는다. 나는 그 중 어떤 가치들의 조합으로 방향을 정했고, 같은 길을 나보다 뒤에서 걷는 사람들에게는 앞에 뭐가 있는지 정도 말해줄 수 있다.
나로서는, 그 길을 완성도 있게 걷는 게 목표다. 성공이 목표가 될 수는 없겠다. 모든 걸 예상할 수 없고, 이제껏 꽤나 좋았던 운이 앞으로는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존경이나 명예도 그렇다. 세상과 불화를 감수하느냐, 아니면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느냐, 고비에 섰을 때 고민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고,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테지만, 그래도 한 방향으로 오래 걷다 보면 일관성은 생기지 않을까. 그게 최소한의 품격은 만들어주지 않을까. 일관성을 지키면 즉흥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내로남불’하지 않고, 잘못을 반성하며 살 수 있으니. 그러다 보면 이호 선생님이나 진선미 사장님처럼 나이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본다. 그게 어른으로서 지금 내 소망이다. 동시에 나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장강명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