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묘미는 역시 벤치의 두뇌 싸움이다. 감독의 작은 제스처는 넓은 그라운드를 지배한다. 야구팬들은 종종 감독들이 벌이는 두뇌 싸움의 꽃으로 수비 시프트를 꼽는다. 여기서 수비 시프트란 수비수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타자의 성향에 따라 수비 위치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단타를 잘 치거나 발이 빠른 타자를 상대할 때 전진 수비를 하거나, 장타자에 대비한 후진 수비, 타자가 번트를 댈 타이밍에 취하는 번트 시프트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수비 시프트 중에는 최형우 시프트라는 게 있다. 기아 타이거즈의 거포 좌타자인 최형우는 밀어치기보다 잡아당기는 타법을 쓰기 때문에 우익수 방향으로 공을 많이 보낸다. 따라서 최형우가 타석에 들어설 때 수비 팀 3루수와 유격수는 평소보다 2루 방향으로 대폭 이동하는 최형우 시프트를 전개한다. 잘 쓰면 안타성 타구를 손쉽게 잡아내는 멋진 플레이를 만들어내지만, 허를 찔리면 독이 될 수 있는 고위험 고수익의 흥미진진한 수비법이다.
야구에 수비 시프트가 있다면, 우리 인생의 골목골목에도 ‘시프트’가 있다. 인생이라는 게임의 감독들인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날 변화를 간파하여, 그에 맞게 우리의 생각과 목표와 감정을 맞추어간다. 적절한 타이밍에 시프트를 구사하는 것이 야구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처럼 나이 듦에 따라 적절한 시프트를 사용하는 것 역시 인생이라는 게임에 흥미를 더해준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인식이다.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또렷한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자각이다. 비로소 우리를 철들게 만드는 깨달음이고, 내 피부 경계 안쪽의 좁은 세계에만 머물러 있었던 인식을 자연과 우주와 인류 보편과 신의 세계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결정적 전환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인식의 시프트’와 함께 우리의 심리 상태 또한 근본적인 시프트를 경험하게 된다. 우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게 만든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아주 친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수는 줄이는 대신 소수의 사람들과 만남의 깊이와 빈도를 늘린다.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과감히 포기한다. 마치 최형우 시프트에서 3루는 아예 포기하는 것처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만나면 기분 나쁜 사람들, 꼭 나갈 필요가 없는 모임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라진다. 이들에게 미움 받는 것이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릇 미움 받을 용기란 나이 들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법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감정의 시프트’도 만들어낸다. 모든 키스가 마지막 키스가 될 수 있음을 의식할 때 우리 내면에서 생겨나는 얽히고설키는 감정들은 젊은 날의 감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즐거워도 마냥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어린아이를 쳐다보는 젊은 부모의 눈빛은 즐거움과 기쁨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하지만, 장성한 자녀를 바라보는 나이 든 부모의 눈빛에는 사랑스러움과 함께 애틋함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기뻐도 마냥 기뻐하지만 않고,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않는다. 감정의 촉이 무뎌져서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나이에 따라 적절하게 시프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산 사람들의 감정은 철학적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우리를 작가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게 하는 ‘관점의 시프트’를 가져온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작가가 된다. 살아온 삶 속에 경험과 소재가 다양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우리 삶의 무게중심을 ‘재미’로부터 ‘의미’로 옮기게 만든다. 나이가 들면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믿게 되며, 지금의 나는 무한히 얽히고설킨 사건과 인연 들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실패에서도 교훈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생이 하나의 스토리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새 자기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는 운명으로 바뀐다.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들이 정지 화면처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인식되기 시작한다. 현재를 음미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지금 여기’의 삶이 살아지게 된다. 젊은 날, 그렇게 깨닫기 어려웠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원리’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깨달아진다. 나이 듦에 따라 변화하는 타구의 방향을 정확히 포착하여 생각과 감정과 행동들을 적절하게 시프트하는 인간이란, 야구로 치자면 귀신 같은 명감독이 아닌가.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역시 시프트가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정작 중요한 일과 정작 중요한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할 시기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하는 시기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2017년을 작가적 관점에서 스토리로 구성해볼 시기다. 잊어버릴 만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삶이 1년씩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축복일 수가 없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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