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도밍게스(73) 재무장관은 필리핀 최고 상류층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필리핀항공, 유나이티드 파라곤 광업 등 대기업을 경영했고, 40대 중반에는 농무장관과 자원장관도 잇따라 지냈다. 그런 도밍게스 집의 주요 소비재는 모두 한국산이다. 도밍게스 부인은 기아차 카니발을 탄다. 가전제품은 TV부터 냉장고, 세탁기 모두 LG 제품이다.
마닐라 시내 호텔 사무원인 카밀 로아(24ㆍ여)씨도 한국 상품 애호가다. 한국 여배우 송혜교가 모델로 나선 화장품을 애용한다. “값은 좀 비싸지만, 미백효과가 뛰어나 언제부턴가 주위 친구들이 한국 화장품을 앞다퉈 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코트라 마닐라무역관에 따르면 필리핀의 한국산 화장품 수입 규모는 최근 3년 매년 두 배 가까이 늘고 있다.
평균 연령 기준 한국 41세보다 18세 젊은 필리핀(23세)이 한국에 빠져들고 있다. 한류를 앞세운 이미지 개선으로 상류층에서 서민계층까지 한국 생활양식이 퍼지고 있다. 2017년 상반기 필리핀 시장 점유율도 전년(6.5%)보다 크게 늘어 8.11%를 기록했다.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와 경제성장에 따른 소비 고급화로 한국제품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필리핀의 지난해 3분기 경제 성장률은 6.9%. 동남아 국가 중 최고다. 베트남(6.2%) 말레이시아(5.4%) 인도네시아(5%)를 모두 앞선다. 탄탄한 내수와 해외에서 쏟아지는 인프라 투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4% 안팎인 인프라 지출을 2022년 7%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1,680억달러로 추정되는 인프라 투자액의 70~80%는 자체 조달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의 원조방식으로 조달할 계획이다. ADB 관계자는 “필리핀에서는 당분간 인프라 투자의 황금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이후 ‘마약과의 전쟁’만 보도되면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직접 와서 본 필리핀 마닐라 거리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마닐라 인근 신도시 타기그의 보니파시오 구역은 매장의 세련됨이나 거리 조경ㆍ통신 등이 서울 강남을 연상시킨다. 잘 정돈된 열대 가로수 사이 곳곳에서 한국 음식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필리핀의 이 같은 변화에 맞춰 유통, 금융은 물론이고 주거 분야까지 한국 기업이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CJ오쇼핑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필리핀 TV홈쇼핑 시장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CJ오쇼핑 현지법인 박춘기 법인장은 “필리핀 서민들이 한류 드라마로 접한 한국 생활용품, 특히 수납용품이나 양면 프라이팬 등이 인기”라고 말했다. 그는 “CJ 오쇼핑은 한국 생활문화의 전파자이자, 한국 중소기업 제품의 필리핀 진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국의 은행도 필리핀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5,000만달러를 투자한 기업은행 마닐라지점은 설립 3년 만에 순이익을 내고 있다. 김갑규 지점장은 “애초 상당 기간 적자를 예상했으나, 한류와 한상(韓商)들의 도움으로 20만달러 가량의 이익을 냈다”고 말했다. “현지 기업을 비롯해 탄탄한 중견업체 50여개를 거래처로 확보한 만큼 올해 본격적인 현지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포스코건설은 아예 한국 주거문화를 통째로 전수하고 있다. 포스코건설의 아파트 브랜드 ‘더샵’의 해외 진출 1호 프로젝트를 ‘클락 자유경제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의 성공을 발판 삼아 분당의 6배 규모인 ‘클락 그린시티’를 필리핀의 ‘송도’로 개발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전력ㆍ에너지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현지 민간발전사업자인 레돈도 페닌슐라 에너지로부터 8억5,000만달러(9,500억원) 규모의 발전소 건설 공사를 수주했고, 포스코건설도 1조원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다 포스코건설의 이 공사는 수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250㎞ 떨어진 잠발레스주 마신록 지역에 600㎿ 규모의 초임계압(Super Critical)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을 향한 한국의 ‘신 남방정책’을 위협하는 잡음도 감지된다. ▦편파적인 외신에 의존한 한국의 필리핀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일부 교민과 한국 관광객의 무례한 행동이다. 천주환 한인총연합회 부회장은 “필리핀은 열심히 노력하면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을 기회의 땅인데도, 한국에서는 마약ㆍ범죄 등 부정적 측면만 부각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또 “일부 관광객ㆍ교민의 현지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고압적 행태가 심각하다”며 “필리핀 지인들로부터 한류 드라마를 통해 신사ㆍ숙녀로 생각했던 한국인들이 실제로는 거칠고 무례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마닐라(필리핀)=조철환 국제부장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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