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머니 사랑 먹고 자라며
장독 열고 냄새 맡는 게 좋았다
대학에선 디자인 전공한 뒤
안정보다 변화에 끌려 한식 공부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하는 건
디자인처럼 한식 혁신을 위해서
“현수야, 우리 현수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으냐?” 할머니가 물으셨다. “에이, 뭘…” 수줍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땅만 봤다. “나는 우리 현수가 제일로 좋다.”
나는 할머니 사랑을 함빡 먹고 자랐다. 강원 원주 시골 마을에서다. 사업하느라 도시에서 지낸 부모님의 빈 자리를 할머니가 넘치게 채워 주셨다. 장손인 나를 할머니는 끔찍이 아끼셨다. 할머니가 중풍과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날. “현수야, 이리 와 봐라.” 잠깐 정신이 돌아 온 할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몰래 주신 건 자식 6남매 모르게 깊이깊이 간직한 손때 묻은 통장. 무뚝뚝한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쓰리고 아리다. 식당에 오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래서 더 정성껏 대접해 드리려 마음 쓴다.
시골 소년이었었던 나. 과자보다 찐 감자, 찐 고구마, 누룽지를 많이 먹었다. 망아지처럼 쏘다니며 개천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먹고 가끔 메뚜기도 튀겨 먹었다. 감자 전분을 반죽해 반투명하게 빚은 감자떡은 그야말로 기막힌 맛이었다. 본능적으로 요리에 끌린 걸까. 장독 뚜껑 열어 장 냄새 킁킁 맡는 게 좋았다. 좁은 재래식 부엌에 들어 가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도 했다. 이 반찬과 저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어떤 맛이 날까. 맛 상상을 즐겼다. 요즘 말로 하면 미니멀한 자연주의 제철 요리를 먹으며 자란 셈이다. 덕분에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나 끌리는 보편적인 맛’이 혀, 뇌, 몸에 새겨졌다. 나 같은 한식 셰프에게는 참 귀한 자산이다.
학창시절에는 혼자 있는 게 좋았다. 골똘히 생각하고 그림 그리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저 온순하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기는 싫었다. 안정보다 변화에 끌렸다. 내 안에서 뭔가 끓어올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요리, 그것도 셰프 지망생들이 외면하는 한식으로 갑자기 방향을 튼 건 나다운 선택이었다. 모두 이탤리언, 프렌치에 달려들 때였다. 나는 밥과 김치를 먹으며 자란 한국인이다. 다른 나라 음식과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단 1%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음식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즐거우면 그만 아닌가. 무서울 게 없었다.
한식 기술을 익히려 학원을 다녔지만 내내 답답했다. 요리 현장에서 부딪히며 진짜 필요한 걸 배우기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우쳤다. 요즘은 ‘누가 더 조금 일하면서 월급을 더 많이 받느냐’가 행복의 지표로 통한다. 벌써 여름 휴가지 가는 비행기표 끊어 놓고 날짜만 세고 있지 않나. 나는 그런 삶은 싫다. 일과 놀이가 따로라면, 일하는 시간은 영원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놀이처럼 즐기며 하는 일을 발견해야 삶이 풍성하다.
나는 ‘인생의 일’로 요리를 택했다. 대충 하기는 싫었다. 최고의 셰프가 되는 길을 찾아 2005년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 외국 유명 요리 학교에 들어가는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미쉐린(미슐랭) 2스타 식당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프렌치 레스토랑 ‘아쿠아’를 비롯해 미국, 일본, 호주의 이름난 식당과 셰프를 찾아 다니며 배웠다. 혹독한 집중 훈련 기간이었다.
누가 내 요리 학벌을 물으면 ‘주방’이라고 답한다. 요즘 너도나도 요리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유학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학교 이름을 경력에 추가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지, 정작 요리는 겉핥기로 배우고 돌아온 사람을 많이 만났다. 요리든, 다른 분야든, 긴 시간을 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게 바로 내공이다. 요리는 나와의 싸움이다. 학교 커리큘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디자인 공부를 중단했지만, 나는 여전히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내 삶을 디자인하고 요리를 디자인한다. 요리 과정은 모든 순간과 단계가 디자인이다. 디자인의 기본 원리가 덜어내기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요즘 한식에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맛, 질감, 효능을 누가 더 꽉꽉 채워 넣나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식은 ‘번거롭고 어려워 차라리 사 먹는 게 현명한 음식’이 됐다. 샐러드, 파스타는 뚝딱 만들어 먹지만 나물, 칼국수 만들기는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통 한식은 그런 게 아니었다. 한국 전통 부엌 구조는 더없이 간결했다. 좁은 공간에 아궁이와 가마솥, 그릇 몇 개면 끝이었다. 천하의 고든 램지 셰프라도 그런 부엌에선 음식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공간을 닮아 한식 조리법도 단순했다.
맛과 멋의 여운이 남는 단아한 음식. 그런 한식을 지향한다. 요즘 찜 요리에 빠져 연구하는 이유다. 복잡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분명 있겠지만, 누구나 편안하게 접근하고 맛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 그런 음식이 소화도 잘 된다. 또 너무 많이 먹다 병들고 죽는 사람이 많은 과잉의 시대 아닌가.
디자인의 또 다른 원리는 틀 깨기다. ‘냉장고를 부탁해’(JTBC) 같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건 한식의 혁신을 위해서다. 방송에서 셰프에게 요리 시간으로 주는 건 고작 15분이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도, 재료가 몇 가지 없어도 한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 한식 조리법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그래서 매번 15분을 치열하게 디자인한다. 방송 출연으로 ‘가벼운 셰프’라는 인상을 줄까 걱정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경력을 쌓은 한식 명인만 TV에 나와 한식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낡은 오해를 깨고 싶었다.
거리에서 파는 치즈 붉닭꼬치는 한식일까.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정체 불명의 음식이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은 정체돼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음식이 한식이다. 단단한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변형과 융합은 한식이 당연히 가야 할 길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식 전통의 맥이 끊겨서 더욱 그렇다. 서양과 달리 요리 고서나 음식 그림 같은 자료가 거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조리법도 상세하지 않고 불친절하다. 그래서 고서나 민화 같은 자료를 보고 오리지널 한식을 유추한다. 민화 속 음식 먹는 장면을 들여다 보고 상상해 재현해 보는 식이다. 옛날 음식을 기계적으로 고증하는 것 자체는 의미 없다. 어차피 식재료도 음식 문화도 달라졌다. 한식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인 나,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맛을 경험한 나에게서 한식의 미래를 찾으려 한다.
2009년 귀국해 곧바로 한식 다이닝에 뛰어들었다.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이십사절기’와 ‘키친플로스’ ‘D6’ 같은 모던 한식당에서 총괄 셰프로 일했다. 지난해 초 서울 가회동 한옥을 개조해 한식 파인다이닝 ‘두레유’를 차렸다. 파인다이닝의 주요 소비층이 몰려 있는 강남을 떠난 것 자체가 오르내렸다. 가회동을 택한 건 또 다른 도전이었다. 요즘 한식 파인다이닝은 셰프와 부유한 한국 손님, 이따금 외국인만 참여하는 그들만의 리그다. 그런 다이닝은 껍데기다. 다이닝이 일상으로 들어와야 한다. 문턱을 낮춰야 한다. 한정식도 달라질 때가 됐다. ‘두레유’를 ‘음식은 조금 촌스럽되, 음식 이외의 모든 경험은 색다른 공간’으로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다.
오너 셰프의 삶은 고단하다고들 한다. 나는 풍요롭다. 욕심을 버렸기에 자유롭다. 식재료 원가, 임대료, 손님 회전율 같은 숫자에 치여 삶을 낭비하는 건 어리석다. 그 어렵다는 자영업, 그것도 요식업을 하면서 나와 식당 직원들이 먹고 살면 충분한 것 아닌가. ‘한식 스타 셰프’로 불리니 더욱 감사한 인생이다.
■유현수(40) 셰프와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박혜인 인턴기자(중앙대 국제정치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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