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외가 친척을 따라 4살 때부터 피아노 앞에 앉았다. 2년 정도 피아노 건반을 누르다 보니 멜로디가 떠올랐고, 7살 때 종이에 음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작곡한 습작들은 유치했지만 맑았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작곡한 연주곡 중 하나는 초심을 다지는 의미로 내 21주년 기념 앨범에 ‘마이 퍼스트 송’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클래식만 알았던 내게 대중음악의 길을 인도해준 이는 그룹 비틀스였다.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음반으로 처음 비틀스를 접했고, 그 뒤로 성장기를 내내 비틀스와 함께 보냈다.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블랙버드’였지만, 비틀스의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들었던 것 같다.
비틀스는 음악을 한 가지 색깔로 정형화하지 않았다. 로큰롤, 팝, 펑크, 하드록 뿐 아니라 발라드, 블루스, 포크, 재즈, 사이키델릭까지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엔 접하기 힘들었던 장르들이 비틀스의 손과 입에서 줄줄이 탄생했다. 비틀스를 알게 된 후 내 음악적 관심은 확장됐다. 밴드 레드제플린, 딥퍼플의 강렬한 기타 연주에 매료됐고, 가수 유재하의 서정성에 빠졌다. 이내 이토록 자유분방한 음악을 나도 한 번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비틀스 음악에 영향을 안 받은 가수는 없다. 우리나라 가요의 새 영역을 개척한 유재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벌스, 브릿지, 후렴구 등 음악의 형식이 비틀스 때부터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음악의 감상을 싱글이 아닌 앨범 위주로 바꾸고 앨범 자체에 작품성을 부여한 가수도 비틀스가 처음이다. 무엇보다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인도 악기 시타르, 첼로, 오르간 등 과감한 악기 실험을 통해 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던 모습이 나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어릴 적부터 작곡이 생활화됐고 끄적거리던 가사들도 제법 쌓였다. 유명한 음악감독이던 외삼촌(드라마 ‘모래시계’ 등의 최경식 음악감독)을 보며 작곡가의 꿈이 커져갔다. 1991년 즈음 외삼촌의 음악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사글세를 구하고 우유와 신문을 돌리는 험난한 데뷔기가 시작됐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날 더 힘들게 했다. 19살 때 허리 사이즈 26인치로 맞는 남자 옷이 없어서 여자 옷을 입을 정도로도 살이 빠졌다. 내게 힘이 됐던 건 역시 음악이다. 매일 녹음실을 청소한 후 직원들이 다 가고 난 빈 스튜디오에서 여러 가지 음악 장비들을 만져볼 수 있었다. 외삼촌의 배려가 없었다면 내 데뷔작인 가수 박준희의 ‘오 보이’(1992)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을까. 1990년대 초반 많은 작품들이 그 스튜디오에서 탄생했다. 그때의 곡들은 표현, 형식, 전반적인 구성에서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분명 자유분방한 개성이 살아있었다.
1996년 남성그룹 DJ DOC의 3집 정규앨범을 프로듀싱하고 혼성그룹 영턱스클럽의 데뷔곡 ‘정’을 발표하면서 점점 이름을 알렸다. 젝스키스와 터보, 엄정화, 김현정, 김건모, 쿨, 구피, 박지윤 등 당대 청춘스타들과 함께 작업했다.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이룬 성공에 눈길을 돌렸지만, 그럴수록 난 음악에만 파고들었다. 한창 노는 게 좋을 20대 초중반의 나이였는데, 그때는 왜인지 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작업에만 몰두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어느 날 업비트의 음악에서 한 템포 낮춰서 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듬앤블루스(R&B)에 흥미가 생겨 1999년 그룹 에즈원의 ‘너만은 모르길’을 작곡했다. 그 곡으로 음악적 색깔이 달라졌고, 마니아층이 형성되는 걸 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었다. ‘너만은 모르길’로 했던 시도는 가수 김범수의 ‘하루’, ‘보고싶다’ 작곡으로 이어졌다.
음악에 진정을 담고 싶어서 ‘하루’를 녹음할 때는 6개월 이상을 작업에 전념했다. 녹음 준비 단계를 철저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범수에게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는 식으로 곡의 진짜 감성을 잡을 것을 요구했다. ‘보고싶다’도 같은 이유로 녹음까지 1년이 걸렸다. 당시 범수가 날 이해하지 못했는데, 요즘엔 “그때 왜 날 그렇게 괴롭혔는지 알겠다”라며 웃는다.
그때는 ‘남들이 알아주든 아니든 무조건 다르게 해보자’는 비틀스의 실험정신이 묘하게 나에게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게 끊임없이 음악을 공부했고 확장해갔다. 데뷔 20년쯤 되니 초심을 잊게 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 보지만 먹어보니 너무 맛있는, 신선한 음악이 필요했다.
2013년 크로스오버 음악을 시도했다. EDM과 트로트 장르를 섞은 가수 김연자 선생님의 ‘아모르파티’가 결과물이었다. ‘아모르파티’는 발매 당시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이 나며 인기를 얻었다.
‘아모르파티’ 역시 넓게 보면 비틀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비틀스는 1970년까지 고작 8년의 활동으로 전세계의 음악 판도를 다 바꿔놨다. 팝, 발라드, 록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음에도 늘 대중성과 작품성이 공존한 음악으로 비틀스 자체를 장르화했다. 나도 내 음악이 하나의 장르가 됐으면 한다. 내 음악을 모아놓은 컴퓨터 파일에 그 소망을 담아 ‘IS(윤일상 이름 이니셜)뮤직’이라는 제목을 달아놓기도 했다.
최근 영화 ‘안시성’의 영화음악 작업을 맡았다. 역시 늘 들었을 만한 음악이 아닌, 이색적인 음악을 만드는 게 나의 목표다. 신선하면서도 영화를 보면서 불편하게 들리지는 않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멜로디를 들으면 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관객의 귓가에 오래도록 남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음악의 본질이 뭘까. 의사소통이다. 멜로디, 비트가 감정을 자극시키고 여기에 가사까지 더해지니 표현이 더 명확해진다. 그래서 음악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예술행위다. 난 대중가요 작곡가이므로 내가 대화해야 할 대상은 가요를 듣는 대중이 된다. 모든 대중을 다 만족시킬 순 없다. 인간이 가지는 수많은 감정 중 내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 한 가지에 집중해 잘 녹여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동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서, 난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설레고 행복하다. 음악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희열을 나에게 선물해준다. 영원히 정복할 순 없겠지만, 더 높은 산에 도전하는 등산가의 마음으로 계속 공부하고 정진하려고 한다.
<프로듀서 윤일상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 했습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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