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강봉균 장관이 오래도록 꿈꾼 세상
빈국에서의 행복은 특권층에 국한될 뿐
‘풍요 속의 불행’ 해소는 후학들의 소명
필자는 지난 1월 31일 군산대에서 개최된 고 강봉균 장관 서거 1주기 추모 강연회에 다녀왔다. 1943년 군산에서 이른바 ‘흙수저’로 태어난 고인은 당시 고등학교 과정인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 고인은 필자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지만 빈곤선 이하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교사 재직 중 서울대를 목표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인을 두고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동료 교사들은 분수를 모르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수군댔다. 학부형들 또한 주제파악을 못하는 선생님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인은 이런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낮에는 선생님으로, 밤에는 수험생으로 주경야독해서 서울대 상대에 합격함으로써 뭇 사람들의 비난에 보란 듯이 답했다.
필자는 1975년 공직을 시작한 2년 후 경제기획원에 전입하면서 당시 상공예산담당관이던 고인과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1987년 5월부터 1년 반 동안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방영권(TV Rights)과장으로 파견되어 근무한 필자는 경제기획원 사회개발계획과장으로 복귀하면서 당시 경제기획국장이던 고인을 직접 모시고 일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스승이었던 분을 공직의 직속 상사로 모시게 되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이다.
한편 1969년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을 시작한 고인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가장 많이 참여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어느 날 고인으로부터 시골 사람이 맹장염이라도 걸리는 날엔 비싼 의료비 때문에 논밭을 파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의 전 국민의료보험제도가 평소 서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던 고인이 경제기획국장이던 1989년 완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로부터 한참을 지난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당시 김영삼 정부에서 정보통신부장관으로 일하던 고인에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아 달라는 뜻을 전한다. 필자는 고인의 천거로 청와대 정책비서관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다시 모실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맞은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던 시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라를 백척간두에서 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열정으로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극복에 헌신하던 고인을 보좌한 경험은 필자로서 일생일대의 가장 큰 보람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암기했던 기억이 있는 1968년에 공포되어 1994년 사실상 폐지된 ‘국민교육헌장’이 있다.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그 가운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문구에 주목한다. 고인은 경제 관료로, 정치인으로 평생을 “나라가 융성해야 개인도 발전한다”는 신념 아래 사신 분이다. 나라는 풍요롭지 않은데 나만 행복하다면 이는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특권일 터이다. 고인을 비롯한 전 국민의 피와 땀이 결실을 맺어 개발연대가 시작된 1961년 100달러도 채 안되던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3만 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라가 풍요로워진 만큼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해서 자살률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년에 고인은 우리나라의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곤 했다. 필자가 특히 마음 아파하는 사실은 나라의 융성을 위해 전력투구하느라 정작 고인 스스로는 노후대비에 소홀히 함으로써 말년을 힘들게 살다 가신 점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의 융성을 개인의 행복으로 연결 지을 수 있을까 항상 걱정하던 고인의 꿈을 제대로 실현시켜야 할 책무가 우리 후학의 역사적 소명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빈다.
오종남 스크랜턴여성리더십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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