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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세] ‘중동의 파리’였던 베이루트, 쓰레기를 어찌할꼬

입력
2018.03.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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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다만세는 ‘다시 만난 세계’의 줄임말입니다. 국제뉴스에서 소외됐던, 그러나 흥미로운 나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여름이면 발길 닿는 해안가마다 비키니를 입은 사람들이 즐비하고, 겨울이면 스키장 한복판에서 란제리 패션쇼가 열린다. 이상할 게 뭐냐 싶지만 여기는 중동의 레바논이다. 술을 마시는 데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자국 맥주 브랜드도 있다. 지난해엔 수도에서 대규모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는데 아랍권에선 당연하게도(?) 초유의 일이었다.

내전과 테러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위험한 나라, 레바논의 숨겨진 모습은 의외였다. ‘아랍권 팝스타들의 성지’인 이 땅엔 예술가의 영혼이 자란다. 세계적인 배우 키아누 리브스와 가수 미카(MIKA), 예언자 칼릴 지브란 등이 레바논 출신이다. 알파벳의 기원 페니키아 문자도 그 품에서 나왔다. 과연 레바논은 어떤 나라일까.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석양이 지고 있다. 플리커 제공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석양이 지고 있다. 플리커 제공

알파벳의 기원, 페니키아 문자의 고향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북쪽엔 고대 항구도시 ‘비블로스’가 자리하고 있다. 비블로스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인류 최고(最古)의 도시다. 동시에 알파벳의 기원이 된 페니키아 문자가 발명된 곳이기도 하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3000년경 비블로스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번성했다. 일찍이 도시 정비를 마친 이들은 그리스 로마시대 훨씬 이전부터 표음문자를 사용했다. 페니키아인들이 개발한 표음문자는 22개의 자음으로 구성됐으며, 이것만 익히면 어떤 말이든 글로 표현할 수 있어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다. 페니키아 문자는, 당시 비블로스가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였던 덕에 주변국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이 문자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건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인들은 단순 상형문자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알아보기 쉬운 페니키아 문자에 감탄해 기원전 9세기부터 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음을 추가했다. 페니키아 문자는 추후 로마 등으로 전파되며 현재의 알파벳 형태를 갖추게 됐다.

페니키아 문자(왼쪽). 알파벳은 페니키아 문자를 해석한 것.
페니키아 문자(왼쪽). 알파벳은 페니키아 문자를 해석한 것.

페니키아인들은 염색 기술에서도 매우 앞서나갔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의 조개에서 추출한 자주색 염료로 직물과 실 등을 염색했는데, ‘붉은 자주’란 뜻을 가진 페니키아라는 이름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 하지만 조개 한 개에서 얻을 수 있는 염료가 극히 적어 자주색 직물은 값이 매우 비쌌다. 때문에 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귀족들만이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실제 신약성경에 그려진 예수의 옷 색깔 또한 자주색이었으며, 로마와 비잔틴 제국에서도 황제나 고위 성직자들만 자주색 옷을 즐겨 입었다.

기독교-이슬람 종파들 권력을 나누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레바논은 국토면적이 한국(9만9,720㎢)의 9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작은 나라다. 이중 절반은 해안지대이고, 나머지 절반엔 깎아지른 산들이 들어서있다. 가장 높은 산(쿠르나 아사다) 정상은 3,088m에 달하며, 해발 2,000m 이상인 산도 13개나 있다. 지중해 어디로나 통하는 해안이 길쭉하게 펼쳐짐과 동시에 별도의 성벽 없이도 방어가 가능한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는 요새. 주변 세력들은 레바논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고자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 1500여 년에 걸친 페니키아의 지배 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이 잇따라 레바논을 지배했다.

레바논은 그러나 여러 차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체제를 유지했다. 사회적으론 총 17개의 다양한 종파를 받아들였는데, 이들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권력을 나누는 방법을 택했다. 1932년 실시한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배출하기로 합의(국민협약)한 것. 종파마다 기념하는 날이 제각기 다르다 보니 휴일도 많은데, 주요한 것만 세어도 10개가 훌쩍 넘는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43년 이후 금융업을 발전시켜 두바이보다 먼저 ‘중동의 금융허브’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열린 프라이드 페스티벌. 5pillars 제공
지난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열린 프라이드 페스티벌. 5pillars 제공

프랑스 지배의 영향으로 레바논의 문화는 굉장히 개방적이다. 동성애자에 사형을 내리는 대부분의 아랍권 국가들과 달리 레바논은 ‘동성애자들의 해방구’이다. 실제 ‘헬렘’(아랍어로 ‘꿈’)이란 동성애자 권리옹호 단체가 활발히 활동할 뿐만 아니라, 베이루트 곳곳에서 게이클럽도 찾을 수 있다.

레바논 출신 가수 엘리사(Elissar)가 벨리댄스를 추고 있다.
레바논 출신 가수 엘리사(Elissar)가 벨리댄스를 추고 있다.
레바논 로컬 맥주. 플리커 제공
레바논 로컬 맥주. 플리커 제공

대중문화도 폐쇄적인 주변 아랍권 국가들은 엄두도 못 낼 만큼 선정적인 경우가 많다. 중동 지역 음반 판매율 1위를 기록한 레바논 출신 가수 엘리사(Elissar)가 대표적이다. 엘리사는 도발적인 표정과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찍은 뮤직비디오로 단번에 아랍권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 여성에 대한 아랍권의 보수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란 시각도 있지만,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킬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레바논의 모든 음악이 이처럼 선정성만을 내세우진 않는다. 레바논 출신 가수 낸시 아즈람(Nancy Ajram)의 경우, 전세계 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월드뮤직어워드에서 세 차례 수상하며 음악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내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레바논의 한 도시. 플리커 제공
내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레바논의 한 도시. 플리커 제공

오랜 내전으로 빛 바랜 영광

다양한 종파를 끌어안은 듯 했던 레바논은 결국 이로 인한 파국을 피하지 못했다. 발단은 이스라엘에 쫓기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본부를 레바논으로 옮기며 촉발됐다. PLO 때문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레바논으로 향하자 기독교계는 PLO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무슬림은 PLO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75년에 기독교인 4명이 살해됐고, 기독교 민병대가 그 배후로 PLO를 지목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탄 버스를 공격한 게 내전의 시발점이 됐다. 당시 26명의 무고한 난민들이 기독교 민병대가 쏜 총에 희생됐다.

피 튀기는 보복은 이후로도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이듬해엔 친미 성향의 바시르 게마옐 대통령이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이에 기독교 민병대와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습격해 2,00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대립이 격화되면서 당시 주레바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서기관이 정체불명의 무장 테러조직에 피랍되기도 했다. 그 서기관은 다행히 1년9개월여 만에 무사 귀국했다. 이후 레바논 내전은 미국과 소련까지 가세하면서 국제분쟁으로 비화되는 듯 했으나, 1989년 ‘아랍연맹 레바논 중재 3국위원회’의 중재로 레바논 국회가 ‘타이프 협정’을 체결하며 가까스로 멈췄다. 타이프 협정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독교와 무슬림의 국회의석을 기존 6대 4에서 5대 5로 재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레바논에 또 다시 전운이 드리운 건 2006년이다. 앞선 내전의 여파로 생겨난 시아파 무장 테러조직 ‘헤즈볼라(Hezbolla)’가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는 ‘남부 레바논군(SLA)’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오자 이스라엘의 반격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인프라 시설은 물론, 민간인 거주지역까지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무력충돌 발생 한달 만에 1,000여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보다 못한 국제사회가 나섰고, 2006년 8월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1701호’를 수용하면서 전쟁은 종료됐다. ‘결의안 1701호’는 공격적 군사행동을 즉각 중단하고, 레바논 내 모든 개인과 단체의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결의안에 따라 각국에서 레바논평화유지군(UNIFIL)이 파병됐는데, 우리나라는 ‘동명부대’가 참여했다. 2017년에 파병 10주년을 맞은 동명부대는 지금까지 총 6,000여명을 레바논에 파병했다. 현재도 300여명의 장병이 현지에서 평화유지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삼나무 숲을 파괴하면 문명이 붕괴하리라’

레바논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엔 7년째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과 사우디-이란 간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사우디-이란 전은 갈등의 불씨가 레바논으로 옮겨 붙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국민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하고 있다. 실제 예멘의 경우, 자국 내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이 사우디와 이란의 대결로 번져 4년째 혹독한 내전을 치르고 있다. 레바논 또한 수니파의 지원을 받는 현 사드 하리리 총리 세력과 헤즈볼라 등 시아파가 맞붙을 경우, 순식간에 사우디-이란의 대리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기나긴 갈등은 레바논을 생각지 못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난 행정력은 도심 쓰레기 수거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때 ‘중동의 파리’라 불리며 아름다움을 뽐내던 베이루트 곳곳에 쓰레기가 수북이 쌓이는 촌극이 벌어졌다. 2015년엔 참다 못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쓰레기 대란’이 일어났고, 정부의 무능까지 개혁하자는 반정부 시위로 격화됐다. 화들짝 놀란 정부가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지만, 쓰레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골칫덩이로 남아있다.

레바논 도로 한쪽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 플리커 제공
레바논 도로 한쪽에 쓰레기가 쌓여 있다. 플리커 제공

계속된 침략과 내전은 레바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나무 숲도 파괴했다. 삼나무는 국기에 그려질 정도로 레바논 사람들에겐 매우 상징적인 존재다. 레바논 삼나무는 유독 해충이 꼬이지 않고, 잘 썩지 않아 이집트 파라오의 관을 짜는 귀하고 값비싼 목재다. 그러나 한 때 레바논 산림 대부분을 울창하게 덮고 있던 삼나무 숲은 현재 1,700만㎡(약 514만평) 밖에 남지 않았다. 고대 ‘길가메시 서사시’에선 “삼나무 숲을 파괴하면 문명이 붕괴할 것”이란 경고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혹자는 무자비한 산림 파괴 때문에 지금의 레바논이 고통 받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12개 삼나무 숲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으나, 최근엔 기후변화에 따른 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우려를 낳고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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