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로 가는 절호의 기회
핵 무력은 체제 안전판일 수 없어
통 큰 결단과 지혜로 대화 임하길
한반도가 요동치고 있다. 판이 바뀌고 틀과 터마저 흔들리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 위기에 봉착했던 한반도가 이제 평화로 가는 길을 열고 있다. 4월 말 남북 정상회담, 5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한반도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회의 신(神)은 ‘한 줌의 앞 머리털만 있는 대머리’라고 하지 않던가!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로 가는 이 한 줌의 머리카락을 잘 잡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화가 지연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급박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이는 문 대통령은 물론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 모두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에게 촉구하고 싶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은 1992년 신년사에서 “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려는 인민의 숙망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조부의 염원은 실현됐는가? 인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장담은 어찌됐는가? 현실은 거꾸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북한의 영양부족 인구는 1999~2001년 3년 평균 850만 명에서 2015~2017년 평균 1,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굳이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중국을 보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30여 년 전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던 중국은 개혁ㆍ개방을 통해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G2 국가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북한 지도층이 내심 가장 비중을 두는 체제안전도 마찬가지다.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가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도 핵무기를 갖는 것만이 체제를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동안 북한은 핵무기 개발 노력을 통해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 흔들어대는 나름의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발 노력을 할 때와 개발이 완료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어떤 경우에도 워싱턴, 뉴욕 등 미국 동부까지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날아오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략을 세운 이상, 북한의 핵무기는 안전한 보호막이 아니라 체제 전체를 걸어야 하는 ‘도박판의 막장 카드’가 될 뿐이다.
북한이 ‘금지선’을 넘어섰다고 판단, 미국이 선제타격을 감행하는 최악의 경우, 김정은 위원장 체제는 온전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은 북한 체제뿐만 아니라 한국에까지도 그 동안 이룩해온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성과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처참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카드는 카드일 때,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패를 공개하거나, 칼을 뺀 순간 절충과 협상은 사라지고, 죽기 살기만 남게 된다. 판돈이 가장 많이 쌓여 있는 지금이 패를 덮고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로 추정되고, 다수의 인민이 굶주리고, 미 프리덤하우스의 자유 지표에서 100점 만점에 3점에 불과한 북한의 처참한 현실을 굳이 재론하고 싶지도 않다.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와 미국 등 개별회원국들의 제재로 ‘북한 옥죄기’도 이제 서서히 효과를 나타나고 있는 판이다.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체제의 안전을 위해서도 4월 남북 정상회담, 5월 북미 정상회담은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의 5년을 보냈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어본다. 유럽에서도 보기 드물게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지방자치, 중립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린 스위스에서의 기억이 가슴 속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다른 길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고 본다.
김정은 위원장의 현명하고 통 큰 결단과 지혜를 기대해본다!
양성철 전 주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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