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다만세는 ‘다시 만난 세계’의 줄임말입니다. 국제뉴스에서 소외됐던, 그러나 흥미로운 나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그루지야 언덕에 밤 안개 걸려있고/ 발 아래 아라브가강 굽이쳐 흐르네/ 내 마음 쓸쓸하고 가벼우며/ 내 슬픔은 너로 가득 차 있네/ 너, 너만이라도… 내 참담한 가슴이여/ 이제 그 무엇도 고통스럽고 심란케 하지 않으니/ 내 심장 또 다시 불타고 벅차 오르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그루지야 언덕에서’란 시다. 우리에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익숙한 푸쉬킨은 이 시를 쓸 당시 조지아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가르는 코카서스 산맥 바로 아래에 위치해 스위스의 광활한 자연풍광과 이탈리아의 맛깔 난 음식, 프랑스의 풍미 깊은 와인을 두루 지닌 조지아는 푸쉬킨 뿐만 아니라 레프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 등이 매혹당한 곳이었다. 이들은 조지아에서 지내는 동안 혹은 이곳을 여행했을 때의 경험과 느낌을 작품으로 남겼다. 톨스토이와 푸쉬킨이 각각 단편소설과 시로 펴낸 동명의 작품 ‘코카서스의 포로’가 대표적이다. 고리키는 한 발 더 나아가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그곳 사람들의 낭만적 기질이 방황하던 날 작가로 만들었다”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러시아 대문호들이 사랑한 나라 조지아는 어떤 곳일까.
프로메테우스의 숨결이 깃든 ‘신화의 땅’
조지아는 유럽, 아시아, 중동을 마주하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상 예부터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문명이 선사해 준 유적지가 곳곳에 있으며, 이 중 일부는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 속 일화에도 등장한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북쪽으로 150㎞ 가량 떨어진 카즈벡(Kazbek) 마을에 깃들어 있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도 그 중 하나다. 인간을 사랑한 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인간에게 불을 준 대가로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야 했다. 불사신이었던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없애고 사슬을 풀어줄 때까지 약 3,000년간 매일같이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가 묶여 있었던 카즈벡 산 정상은 해발 5,000m로 매우 험준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독수리가 많아 으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2의 도시라 불리는 쿠타이시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잡히기 전 몸을 숨겼다던 ‘프로메테우스 동굴’도 있다.
흑해와 맞닿은 조지아의 대표적 해안도시 바투미(Batumi)에선 황금양털을 찾아온 이아손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아손은 왕위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아버지 펠리아스의 계략으로 이곳에 왔다가 메데이아를 만났다. 메데이아는 가족을 배신하고 이아손에게 황금양털을 건네준다. 둘의 사랑은 이아손이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며 파국을 맞지만, 두 사람이 이곳에서 나눴던 사랑만큼은 아름다운 흑해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이곳엔 메데이아가 이아손과 도망치기 위해 죽였던 동생 압시르토스의 무덤도 남아있다.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이후 정착한 곳도 조지아다. 창세기 9장 20~21절에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셨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장소가 조지아인 것. 성경에 따르면 노아는 최초의 포도나무 경작자였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매우 즐겨 마셨다. 한 번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는데, 이를 흉본 아들에겐 저주를 내리고, 이를 가려준 아들은 축복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조지아의 인간 백정’ 스탈린에 대한 분노와 향수
조지아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이어 제2대 공산당 서기장에 올라 30여년간 소련을 통치했다. 그는 유독 조지아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굴어 그가 조지아 태생인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로, 조지아의 작은 소도시 ‘고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직자를 꿈꿨고, 이를 위해 신학교에 진학했었다. 하지만 심각한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탓에 그의 가슴은 서서히 분노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신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마르크스의 폭력 혁명론에 빠져든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혁명가로 거듭났다. 스탈린은 레닌의 총애를 받았고, 1912년 레닌의 도움으로 볼셰비키 중앙위원에 위촉됐다. 이 때부터 본명을 버리고 러시아어로 강철인이란 뜻의 필명 ‘스탈린’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스스로를 조지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 불렀다.
스탈린의 잔혹함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그가 1922년 제2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부터다. 소련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혁명을 반대했던 조지아인들은 물론, 1인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방해되는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1934년부터 3년 넘게 이어진 대숙청 시기엔 친인척들까지도 없애버리며 철권통치를 본격화했다. 이 시기엔 산업화와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하며 근대화를 주도하기도 했는데, 극심한 착취로 수백만 농민들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또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상대방을 인민의 적으로 판단하면 어떤 인연이든 소멸한다”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그의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스탈린의 지나친 광기에 무수한 사람들이 숙청당하자 조지아 사람들은 그를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박해를 당했는데도 조지아인들은 스탈린을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스탈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도 많다. 매년 스탈린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의 동상엔 그를 추모하는 꽃이 수북이 쌓이고, 도심에선 집회행렬이 이어진다. 이 동상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 ‘독재자의 동상’이란 이유로 철거됐지만, 2012년 그를 추억하는 여론에 밀려 다시 세워졌다.
러시아식 ‘그루지야’ 대신 영어식 ‘조지아’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소련의 지배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조지아는 1991년 4월9일 가까스로 독립을 이뤘다. 당시 조지아는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하나로 흡수돼 있었다. 독립 직후 조지아 정부는 국제사회에 그루지야(러시아식 명칭) 대신 조지아(영어식 명칭)로 불러달라 요청했다. 미국에 동명의 주(州)가 있어 혼선이 예상됨에도,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컸던 탓에 러시아식 명칭을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 후에도 조지아는 러시아의 간섭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 지역이 인종ㆍ문화적 이유로 ‘친러시아’ 노선을 택하며 분리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등과 함께 반(反)러시아 벨트를 형성해 온 조지아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게다가 러시아를 등에 업은 두 지역은 기세 등등하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아는 1991년 남오세티아에서 내전을 벌인데 이어 1992년엔 압하지아에서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을 벌이며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전면에 나섰고, 조지아의 수출길을 옥죄며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러시아의 강경 대응으로 중단되는 듯 했던 전쟁은 2008년 8월 남오세티아 대 조지아로 또 한 번 화염이 일었다. 조지아 정부가 남오세티아 내 분리독립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고 무력진압을 시도한 것. 그러자 러시아가 남오세티아 내 자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또 한 번 맞불을 놓았고, 전쟁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 전쟁이 조지아 대 러시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조지아 정부군은 러시아에서 몰려온 대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러시아가 남오세티아 자치주의 수도인 츠한빌리에서 조지아 정부군을 밀어내며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지아가 휴전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사적 압박을 계속 가했다. 그 결과 순식간에 2,0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조지아의 사회ㆍ경제 시스템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조지아와 러시아가 평화협정에 동의하면서 전쟁은 중단됐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압하지아와 남오세티아의 분리독립 요구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러시아 역시 이 두 지역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가 두 지역에 집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자원이다. 조지아는 카스피해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공급하는 길목에 위치해 각종 송유관이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다. 문제는 해당 송유관들이 러시아를 지나지 않는다는 점. 이에 러시아는 분리독립을 원하는 조지아 내 두 지역을 꾀어내 송유관이 지나는 길을 확보하고, 동시에 구소련이 지배했던 이곳에서 꾸준히 영향권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조지아에서 한 달 살기’ 도전해 봐?
러시아와의 대립은 조지아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는 2005년 이후 조지아의 최대 수출국이었으나 2006년 10월부터 조지아 상품의 수입을 전면 중단했다. 당시 친서방정책을 펼쳤던 시카쉬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대신 교역국 다원화를 택했고, 조지아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8년 러시아와의 전면전 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쳐 국민들의 삶은 계속 피폐해졌다. 상황이 반전된 건 2012년부터다. 그 해 총선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이바니쉬빌리 총리가 집권하면서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주력했고, 그 결과 2013년엔 조지아산 포도주와 광천수, 농산물 등의 대러수출을 재개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지아의 대러 수출비중은 고점을 찍었던 2005년 17.7%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4%(2015년 기준)에 그치고 있다. 이 밖에도 조지아는 러시아 등 해외 노동자들의 송금액이 국내총생산(GDP)의 12%(2012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최근 루블화의 가치가 급락해 경기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관광만큼은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트래킹과 해양스포츠, 스파 등을 한번에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 덕이다. 2016년 기준 관광수입은 17억 달러로, 전체 GDP의 7.3%가량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관광객 또한 최근 급증하고 있다. 2016년 3,800여명에 불과했던 한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7,000명에 달했다.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물가가 저렴해 ‘조지아에서 한 달 살기’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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