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게 된 김정은과 트럼프의 면모
진정성으로 신뢰외교 자산 쌓은 문재인
3자가 협력해 위대한 업적 이뤄 내기를
요즘 김정은과 트럼프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 이 칼럼 난 등을 통해서 두 사람에 대해 ‘미치광이’(mad man) ‘ 등의 표현을 써가며 적잖이 비판을 가했던 터이다(물론 미치광이라는 표현은 당사자들이 먼저 썼다). 그런데 요즘 두 사람 하는 걸 보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015년 여름 트럼프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온갖 기행과 막말로 논란과 화제를 불렀다. 그 모습이 우리의 17, 18대 대선 때 기행과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허경영씨 일명 ‘허본좌’의 행태 그대로였다. 나는 그즈음 쓴 칼럼의 한 대목에서 그를 ‘미국판 허경영’ ‘트본좌’ 로 치부하며 경멸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당시 한 방송 토크쇼에서 집권 3년밖에 안 되던 김정은에 대해 “천재거나 미쳤거나”라는 촌평을 남겼다. 요즘 김정은의 변신에 비춰 보면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김정은과 트럼프 두 사람은 서로를 미치광이라고 비난하며 연일 한반도 전쟁 위험 지수를 끌어올렸다. 그때 나는 ‘두 미치광이와 우리의 일상’이란 칼럼에서 “수십만 수백만 인명을 인질로 삼아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치광이들”이라고 두 사람을 싸잡아 비판했다. 그로부터 반년도 채 안 지난 지금은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 동북아 신질서 태동이라는 대전환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이 대서사 드라마의 중심에 김정은과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이 있다. 누구는 말한다. 이 드라마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은 김정은이 아니냐고. 올 신년사를 시작으로 그가 고비마다 전문가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선제적 조치로 판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여정 대남특사파견, 북미 정상회담 제안, 북중 정상회담, 핵•경제 병진노선 종료와 핵 동결 조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혼자 주도하는 드라마는 결코 아니다.
문재인은 나라 안팎 보수세력의 우려와 견제를 무릅쓰고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위해 레드 카페트를 깔아 줬다. 국제사회의 북한 제재에는 적극 동참하면서도 일관된 대화 메시지를 보냈다. 한반도 전쟁 절대반대 천명은 군사적 옵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강경파를 화나게 했지만 김정은에게는 과감한 발걸음을 내딛게 한 초대장이 됐다. 우직스러워 보일 정도의 진정성은 주변 국가들에 신뢰감을 줘 중재외교의 자산이 됐다. 문재인의 이런 멍석 깔기가 없었다면 김정은의 선제적 조치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의 변화가 자신의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의 결과라며 우쭐해 한다. 이 드라마의 진정한 연출자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행 중인 한반도 정세 변화는 김정은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로드맵의 일부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트럼프의 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김정은과 문재인이 아무리 용을 써도, 트럼프가 호응하지 않았다면 별로 달라질 게 없다. 미 의회 내 뿌리깊은 대북 불신과 원칙론, 미국 조야 북한 전문가들의 박제된 고정관념을 뿌리치고 김정은의 정상회담 제안을 과감하게 수용한 건 독특한 성향의 트럼프였기에 가능했다.
결국 목하 인기리에 방영 중인 한반도 대서사 드라마는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3인의 절묘한 3각 궁합 산물이라고 봐야 옳다. 다른 조합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드라마를 3자의 궁합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선 김정은의 숨은 의도나 트럼프의 변덕을 들어 슬픈 결말을 점치기도 한다. 물론 실패 리스크는 배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드라마 성공의 실익이 3자에게 매우 큰 탓에 누구도 쉽게 판을 깨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일각의 비관론과는 달리 탄탄하게 드라마가 진행돼 결국 해피엔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 이유다.
어떤 이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도 한다. 3인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3인이 어울릴 상황이 마련된 게 더 큰 행운이라는 것이다. 결코 놓쳐서는 안될 천시다. 진보 보수를 초월해 지금은 문ㆍ김ㆍ트 3각 궁합이 선순환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이루도록 간절히 바라는 게 옳다. 홍준표 대표님, 안 그렇습니까.
이계성 논설고문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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