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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이상 3514만명 ‘초고령사회’
이 중 770만명은 일하면서 소득
광장서 분노하는 한국 노인과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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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취업 쉬운 日 사회시스템
일선 기업들 정년 60세지만
법 개정해 희망자 65세까지 일해
노인들 “나도 사회에 공헌”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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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기업 ‘마이스터 60’
빌딩관리ㆍ건설업 등 고령자 알선
작년 60세 이상 360명 재취업시켜
매년 파견자 초대 ‘인생2막’ 파티
일본 입국을 위해 도쿄(東京) 나리타(成田) 국제공항으로 들어서면 외국인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풍경은 입국 심사대 주변을 에워싸는 백발 성성한 노인들이다. 하나같이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삼삼오오 팀을 이뤄 입국 심사대의 비어있는 곳으로 외국인들을 보내 길게 늘어진 줄을 정리하거나 입국심사 서류 작성을 돕는다. 간단한 영어 회화와 보디랭귀지만으로 현장을 합리적으로 제어하는 모습. 공공장소와 광장에서 생활현장과 정치이슈의 희생자로 내몰린 채 분노를 터트리는 우리의 노인들과 확연히 다르다. ‘노인 왕국’ 일본의 현재를 실감할 수 있는 첫 번째 장면이다.
평균 수명 83.84세. 인구 1억 2,671만명. 65세 이상 고령자 3,514만명. 세계보건기구(WHO)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를 넘으면 고령사회, 21%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정의한다. 이웃 나라 일본은 이미 국민 4분의 1 이상이 노인 인구인 초(超)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노인 부양에 소진되는 젊은 세대의 땀의 중량도 늘어가기 마련이다. 일터의 고령화가 겹쳐지면서 일자리를 노인과 나눠 가져야 하는 청년들의 고통이 커진다.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서 젊은 세대는 노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무시하며, 노인은 분노하는 사회가 형성되기 일쑤다. 그러나 고령화 수준에 있어 우리를 월등히 앞서는 일본의 노인들은 쉽게 분노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치집회에서 해묵은 신념을 젊은이들에 강요하며 성을 내지도 않는다. 일본의 전문가들은 노인의 사회적 가치를 유지시켜주는 풍부한 일자리, 그리고 이들의 삶을 존중하는 정밀한 사회 시스템을 이유로 꼽는다. 분노하는 노인이 존중받는 어르신으로 당당히 일어서는 곳. 일본이 우리 사회에 제시하는 첫 번째 해답은 노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일하는 사회적 환경이다. 65세 이상 근로 소득이 있는 사람이 770만명. 일선 기업의 정년 연령이 60세이지만 정부가 2006년부터 시행한 고연령자 고용안정법으로 희망할 경우 누구나 6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일본. ‘성난 노인들의 사회’로 상처입은 우리 사회와 정확히 대척점에 놓여 있다.
‘회사를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니다’
1989년 어느 날, 일본의 주식회사 마이스터 엔지니어링의 히라노 시게오(車野茂夫ㆍ76) 사장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문장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디오 청취자들이 공모하는 일본 전통시 ‘센류(川柳)’ 의 형식으로, 회사원의 애환을 담은 시구였다. 히라노 사장은 ‘지식과 경험, 체력도 있고 일할 의지가 있는데 정년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게 정말로 이상하다’고 여겼다. 일본의 정년 제도에 메스를 대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생각은 이듬해인 1990년 자회사 ‘마이스터60’을 창립하는 데까지 빠르게 이어졌다.
일본 도쿄 시나가와(品川)구에 자리한 ‘마이스터60’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60세 이상 시니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인재 파견회사다. 이 회사는 기업을 상대로 구인 정보를 제공하거나 빌딩 관리나 건설업, 사무직으로 구직자를 보내주는 일을 주 업무로 삼는다. 올해 이곳에 등록된 구직자 9,023명(3월 말 기준)의 평균 연령은 65.4세. 430명가량의 회사 고용자의 85%도 60세 이상이다. 그야말로 노인들의, 노인들을 위한 기업인 셈이다.
하지만 마이스터60의 탄생은 매우 시대 역행적이었다. 창립한 1990년은 일본 경제의 거품이 막 꺼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어서다. 기업마다 과도한 설비투자와 넘치는 인력으로 구조조정을 고민할 때였기에 60세 이상 고령자를 받아줄 기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때였다. 회사는 이후 오래도록 적자를 봤지만 회사 지분의 40%를 갖고 있던 벤처캐피털인 오사카 투자육성의 지원으로 버틸 수 있었다.
마이스터60의 이구치 쥰지(井口順二ㆍ66) 시니어 비즈니스개발부장은 노인 인력의 장점으로 “풍부한 경험으로 새로운 훈련 없이 바로 투입이 가능하다는 점과 저렴한 인건비”라고 말했다. 그는 “마이스터60은 빌딩관리 자격증을 보유한 구직자와 현장감독 경험이 있는 건설업 베테랑 인력을 기업들에 알선하며, 기업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60세 이상 고령자의 취업 알선에는 청년취업보다 더 섬세한 관리가 필요했다. 이구치 부장은 이 과정을 ‘수제(手製)’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일반 파견 업체가 인력을 파견처에 기계적으로 알선한다면 이곳은 취업희망 등록자들의 가족 구성원과 교통편, 취미까지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그에 맞는 직장을 알선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다는 얘기이다. 지난해에는 이곳을 통해 360명의 60세이상 구직자가 새 일터를 찾았다.
60세에 새 직장 얻고 15년 일한다
고령자 취업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마이스터60은 노인 취업 실패 유형으로 자존심이 세고 유연성이 없는 경우, 과거 자신의 지인 인맥 등에 연연하는 등 화려했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를 꼽는다. 이들이 소개를 받아 새일터로 보내져 파견처에서 마찰을 빚는 경우가 생긴다고 분석했다. 건강문제도 구직자들의 발목을 잡는 요소다. 비단 본인의 건강문제뿐 아니라 초고령화 사회 일본에서는 60대 근로자가 80, 90대인 부모를 간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회사는 고령자 취업 업종도 점점 넓히고 있다. 인바운드 비즈니스 개발실에서는 일본으로 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고령자 일자리도 개발 중이다. 영어를 구사하는 고령자들을 위한 안내 가이드 등의 일자리다. 특히 여성 구직자들의 수요가 높다고 한다.
60세에 새로 직장을 찾는다면 얼마나 일할 수 있을까. 마이스터60은 1년에 한 번씩 파견자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이들은 가족들을 파티에 모두 초청해 ‘인생 2막’을 여는 이들의 모습을 함께 축하한다. 파티에서는 매년 ‘10년 연속 근로자’를 선정해 표창하는데, 올해에는 15년 연속 근무자가 10명이 넘었다. 이구치 부장은 “60세에 새 직장을 찾았다면 75세까지 근무한 셈인데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나이는 등 번호일 뿐, 인생에 정년은 없다’는 회사의 캐치프레이즈를 생생하게 대변한다.
고령자 일자리는 단지 생계수단이 아니다
마이스터60에서 파견자 관리와 신규업체 영업을 담당하는 쓰카모토 다카유키(塚本孝幸ㆍ60)씨는 지난해 12월 38년간 몸담은 제약회사를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생을 바쳤던 직장은 불황 때문에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쓰카모토씨는 구조조정을 담당했다. 원하면 65세까지 일할 수 있었지만, “구조조정 대상자를 가려내는 일을 했던 내가 정년 이후에도 그 자리에 있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라는 이유로 회사를 나왔다.
그는 “처음에는 구직기간을 6개월 정도로 잡았지만 사회로부터 떨어져나온 기분 때문인지 굉장히 불안해져 구직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두달 간의 구직 생활을 거친 후 마이스터60에서 파견자 관리를 하는 일자리를 잡게 된 쓰카모토씨는 “나 자신이 구직의 불안을 겪었기에 구직자들이 겉으로는 괜찮다는 듯이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굉장히 불안정 해하는 심리의 양면을 잘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고령)구직자들은 나의 인생 선배들인데 이들이 필요한 부분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사회 공헌을 한다는 점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덧붙였다.
첫 직장을 퇴직하던 지난해만 해도 연금 수령 시작 연령인 65세까지만 일할 계획이었다는 쓰카모토씨는 직장 생활을 하며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는 “내 옆에서 일하는 분도 77세인데 영업을 하신다”라며 “도쿄 교외에서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하며 일할 수 있을만큼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령자에게 일자리란 생계의 수단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쓰카모토씨는 “아직 충분히 일할 수도 있고, 경험도 있는데 오직 나이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 이들에게 직장을 제공함으로써 ‘나도 사회의 공헌자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기쁨이 솟는다. 고령자에게는 이런 즐거움이 삶의 보람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도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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