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탐정’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일상의 민낯을 맛깔스럽게 표현
두 작품 동시에 인기몰이
한 캐릭터서 희ㆍ비극 동시 보여줘
힘겹게 살아온 인생 역정의 산물
애드리브로 활력 ‘아이디어 뱅크’
“성동일 배우가 공무원으로 나오면 작품이 잘 되는 것 같다.” CJ엔터테인먼트 관계자가 한 말이다. 성동일(51)이 공무원으로 나오는 두 작품이 최근 극장가와 안방극장에서 동시에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어서다. 성동일은 지난 14일부터 3주째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탐정: 리턴즈’에서 경찰인 노태수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부장판사 한세상으로 각각 나와 극을 빛낸다.
광기 대신 짠내… ‘국민 경찰’ 성동일
실없는 농담만은 아니다. 성동일과 공무원의 인연을 들여다보면 묘한 궁합을 찾을 수 있다. 성동일은 시민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공무원의 옷을 입고 일상의 민낯을 누구보다 맛깔스럽게 보여 준다.
그는 초등학생 쌍둥이 딸이 생선회를 못 먹는 걸 모르고 식사 장소로 횟집을 예약해 아내에게 면박을 받는, 눈치 없는 가장이자 경찰이지만 범죄 현장에선 특유의 촉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일등공신이다(‘탐정: 리턴즈’).
성동일은 평소엔 위축되거나 널브러져 있다가 특정 순간 낯빛이 180도 변하는 반전의 묘수다. 베짱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개미에 가까운 공무원의 상반된 겉과 속을 성동일만큼 ‘짠내나게’ 보여 주는 배우도 드물다. 동네 지인 모임을 가장 먼저 챙기며 어떤 연예인보다 가까이에서 서민의 모습을 지켜봐 온 결과다.
27년차 이 배우에겐 요즘 공무원 특히 경찰 역이 몰린다. 성동일은 영화 ‘청년경찰’과 ‘반드시 잡는다’를 비롯해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과 ‘라이브’ 등 최근 1년 사이 극에서 제복만 여섯 번을 입었다.
같은 경찰 역이지만 물리지 않는 건 그의 변주 능력 덕이다. 성동일은 번뜩이는 순발력으로 딱딱한 제복에 익살을 때론 눈물을 입힌다. 또래 배우인 김윤석, 박신양 같은 광기 대신, 물 흐르듯 편안하게 관객과 시청자에게 다가가는 게 그의 장점이다.
“백발의 애드리브 은행”
“성동일은 애드리브 은행”(‘탐정: 리턴즈’의 이언희 감독)이다. 촬영장에서 후배에게 대본에 없는 돌발 아이디어를 ‘대출’해 줘 활력을 준다. ‘탐정: 리턴즈’에서 사이버수사대 출신 해커인 여치형(이광수)은 강대만(권상우)과 노태수의 사무실에서 “이거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고 심각하게 말한 뒤 의자에 앉다가 넘어진다. 성동일이 감독뿐 아니라 이광수에게 알리지 않고 현장에서 몸과 의자 사이에 틈을 벌려놨다. 어수룩한 여치형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낸 아이디어였다.
까마득한 후배인 이광수와 친분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성동일은 촬영장에서 분위기 메이커다. 그는 여느 유명 배우들처럼 촬영 대기 시간에 자신의 차에만 콕 틀어박혀 있지 않는다. “동네 아저씨처럼 슬리퍼를 끌고 어슬렁어슬렁 마실 가듯 후배나 스태프들 대기실을 찾아가 농담을 건네며”(성동일 매니저 진욱형) 친분을 다진다. 현장이 즐거워야 작품이 즐겁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배우를 “연기하는 기술자이자 노동자”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흰머리가 무성한 배우는 촬영장에서 개구쟁이를 자처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성동일은 시티폰(1990년대 후반 짧게 이용됐다 사라진 휴대폰의 일종)에 주식 투자를 했다가 1억원을 날린다. “‘멘붕’에 빠진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 갑자기 ‘나 잠깐만’ 하고 사라진 뒤 눈 밑을 직접 분장해 다크서클을 그리고 카메라 앞에 나타나 손호준 등 배우들이 숨죽여 웃느라 방송에서 동료 배우들의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이 나가게 만드는”(신원호 ‘응답하라’ 시리즈 PD) 식이다.
페이소스의 친근함
엉뚱함만을 바탕으로 한 웃음의 유효기간은 짧다. 성동일은 희극과 비극을 한 캐릭터에서 동시에 보여 줘 가상인물에 묘한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유산한) 당신 배석(판사)한테는 가봤어?” ‘미스 함무라비’에서 한세상이 동료 부장판사 성공충(차순배)에게 일도 좋지만 사람을 먼저 챙겨야 한다며 던진 충고는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아리다. “성동일은 너무 폼 잡지 않고 페이소스(Pathosㆍ연민)를 우려내 더 큰 공감대를 끌어내는 재능을 지녔다.”(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 같은 배우가 바로 성동일”(‘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의 김용화 감독)이다. 성동일이 희극과 비극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데는 그가 굴곡진 삶에서 얻은 교훈과 무관하지 않다. 성동일은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기울어진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성동일의 연기 원동력은 절박함이었다. 1991년 S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단역은 물론 아침 프로그램 패널 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런데도 그가 10년 동안 손에 쥔 돈은 120만원에 불과했다. 1980년대부터 연극배우로 시작, 무명 배우로 살았던 그는 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에서만 25년을 살며 절망을 몸에 새겼다.
극장 앞 건달 남자1→국민 아버지→?
성동일이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빨간양말’이었다. 1998년 드라마 ‘은실이’에서 동네 건달 양정팔 역을 맡은 그는 빨간양말을 신고 청국장 냄새 풀풀 풍기는 사투리를 선보이며 단숨에 ‘신스틸러’가 됐다. 이후 성동일은 ‘왕룽의 대지’ ‘야인시대’ ‘태양의 남쪽’ ‘패션 70s’ 등의 드라마에 연달아 출연했지만 코믹한 이미지에 갇혀 10여년 동안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빨간양말’의 영광을 다시 찾게 해 준 건 영화 ‘국가대표’와 드라마 ‘추노’였다. 특히 ‘추노’에서 성동일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추노꾼 천지호 역을 맡은 성동일은 이까지 직접 검게 칠해 배역의 비열함을 생생하게 살렸다. ‘극장 앞 건달인 남자1’(‘은실이’)로 시작해 살벌한 추노꾼(‘추노’)을 거쳐 ‘국민 아버지’(‘응답하라’ 시리즈)로 푸근함을 주다 ‘국민 경찰’이 됐다. 채플린 같은 배우의 다음 모습은 무엇일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