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인들의 하라주쿠’라 불리는
도쿄 번화가엔 상점, 병원 수십곳
소금찹쌀떡, 양갱 등 맛집 앞 긴줄
#2
차량 통제하고 가게 문턱 없애
휠체어 탄 노인들도 쉽게 이동
주민센터 게시판엔 고령층 위한
컴퓨터교실, 합창단 등 모집 안내
#3
아베 퇴진 요구하는 집회에선
50~70대 폭력 없이 ‘조용한 시위’
“노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요? 글쎄요….”
일본에서 주로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물었을 때 대체로 딱 부러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처럼 노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일본에서 노인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서나 소외되지 않는 존재였다. 물과 기름처럼 항상 어울리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청년과 노인의 모습과는 상반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런 일본에도 ‘노인들의 하라주쿠(原宿)’라 불리는 번화가가 있다. 하라주쿠는 도쿄(東京) 시부야(涉谷)구에 위치한 상가 밀집지로 우리의 홍대거리에 비견되는 상권이다. 도쿄 도심 북쪽에 위치한 JR 스가모(巢鴨)역에서 내리면 만날 수 있는 스가모 지조도리(巢鴨地臟通) 상점가. 다시 말하면 ‘일본 노인들의 홍대거리’ 정도가 되는 셈이다. 약 800㎙ 길이의 스가모 지조도리는 노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주로 파는 상점 수십 곳과 즐길 거리들이 모여있는 유명한 거리다.
스가모 지조도리를 찾은 지난달 4일 오후는 관광객보다 현지 노인 방문객으로 붐볐다. 거리 입구에 들어서면 건강을 상징하는 빨간색 속옷들의 강렬한 비주얼이 눈을 사로잡고 소금 찹쌀떡, 양갱 등을 판매하는 유명 맛집들 앞에 늘어선 노인들의 긴 줄과 마주한다.
여느 관광지와 비슷해 보이는 거리 초입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본격적으로 노인 전문 상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모자가게와 1,000엔(약 1만100원) 기념품샵, 슈퍼마켓과 마사지 시술소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한 채소가게에 들어서자 시선이 확 낮아지는 걸 느꼈다. 벽 선반은 대체로 키가 작은 노인들을 배려해 기존 가게들보다 훨씬 낮게 부착돼 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명이 각종 채소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대부분 상품은 힘들이지 않게 시선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스가모 지조도리에 자리한 2층짜리 병원 건물에는 1층엔 재활전문, 2층은 치과가 들어서있었다. 노인들의 수요가 많은 진료과목들이다. 우리나라 주민센터에 해당하는 공민관 게시판에는 노인들을 위한 컴퓨터 교실, 합창단 모집 등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 활동을 알리는 공보물이 붙어있다.
드문드문 자리한 카페도 청년들이 찾는 모던한 디자인보다는 노인 세대에 더 친숙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다. ‘크림소다’와 ‘토스트’처럼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메뉴가 주로 눈에 띈다. 스가모 거리에서 쇼핑을 하던 노인들도 카페에 앉아 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거리 사이 골목에는 저렴한 화분을 파는 꽃가게가 있고, 중간중간 앉아 쉬어갈 수 있도록 자리도 마련돼 있다. 쇼핑한 물건들을 내려놓은 채 카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즐기던 60대 여성은 “한 달에 두세번 정도 혼자, 또는 친구들과 스가모 거리에서 쇼핑하고 차를 마신다”라며 “스가모 거리에서는 또래 노인들과 느긋하게 쇼핑할 수 있어 특히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800m에 달하는 거리는 차량 진입이 통제돼 있고 인도와 도로의 단차가 없어 휠체어를 탄 노인도, 자전거를 탄 노인도 여유 있게 거리를 오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노인들의 이동 편의성을 위해 대부분의 가게도 문턱을 없앴다.
일본에서 많은 노인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공교롭게도 시위현장이다. 지난달 4일 오후 6시 30분 도쿄 신주쿠(新宿)역 서쪽 출구 광장에서는 아베 내각 퇴진 시위가 한창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부부의 사학 추문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2월 이후 일본에서는 아베 내각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장 앞에는 ‘당연한 정치를 되찾는다 - 0604 신주쿠 선언’이라 쓰인 플래카드가 설치된 연단에서 공산당 참의원과 사민당 당수 등이 마이크를 이어받아 연설하고 있었다.
퇴근길 직장인들과 어지럽게 얽힌 시위 현장에서 ‘아베 내각 퇴진!’, ‘헌법 9조 개악 NO!’ 등의 문구가 쓰인 푯말과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시위 참석자 상당수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장ㆍ노년층 이상이었다. 장기간 이어진 내각 퇴진 시위는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한국의 태극기 집회와는 달리 폭력적인 분위기도 아니었다. 신주쿠 역 광장의 시위는 분주한 퇴근길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고, 경찰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80대 여성은 “한국의 노인들이 일본 노인들보다 더 활기차다는 인상이 있다”라며 “다른 지역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시민단체 사람들과 우익단체가 충돌해 몇 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경찰이 바로 개입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연금생활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70대 시위 참석자는 “아베 정권은 사학 추문뿐만 아니라 헌법9조를 폐기하려 하고,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등으로 말도 안 되는 헌법 초월 시도를 하고 있다”며 “아베 퇴진 시위는 3년 전부터 활성화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 시켰듯이 아베를 몰아내기 위해 노인들이 앞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위 참석자 상당수가 50~70대라고 밝히며 “아무래도 전쟁 직후 고생했던 세대라 이런 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고 말했다. 시위에 청년세대가 많이 참여하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젊은 세대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점도 있지만 많은 경우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느라 정치적 활동을 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녀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노인을 보살피기 위해 발달한 각종 산업 가운데 요란하지 않은 ‘은근한 케어’도 일본에선 인기다. 일본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가운데 ‘보살핌(Care)’ 카테고리에서는 스마트폰 화면을 켜면 등록된 전화번호로 알림이 가도록 하는 유료 앱이 가장 많은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도쿄의 한 30대 직장인은 “부모님들이 자신을 노인 취급하는 걸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 자녀가 몰래 부모의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해두고 자신에게 알림이 가도록 해 안부를 확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도쿄=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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