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분기 성장률 4.2%, 4년내 최고
실업률 3.9%로 완전고용 가까워
파월 연준 의장 “美 경제 강하다”
하반기 두 차례 추가 금리인상 예고
글로벌 투자자금 美로 몰려들며
외채부담 높은 신흥국은 줄도산
터키 통화 폭락ㆍ아르헨은 구제금융
“20년 전 亞 외환위기 상황과 비슷”
남아공ㆍ브라질 등으로 확산 고조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다. 40년간 올바르게 작동하던 미국 경제정책이 충격을 받았다. 위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세계적 투자은행(IB) 리먼 브러더스가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한지 한 달여가 지난 2008년 10월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하원 청문회장.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연준ㆍFed) 의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이 말하고 고개를 떨궜다. ‘미국 경제의 신’이라 불리던 그의 참담한 고해성사는 위기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했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미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금융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고 일자리 880만개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부동산 시장의 붕괴에 따른 집값 폭락으로 가계 자산 19조2,000억달러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10년 뒤 미국은 ‘나홀로 호황’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은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대규모 감세와 규제완화 정책 등에 힘입어 사상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고 있다. 연준이 지난달 통화정책 회의를 마치고 발표한 성명서는 첫 문단에서만 ‘강하다(strong)’는 단어를 세 차례 나 사용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역시 “미국 경제는 강하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실제 미국 경제의 상승세는 거침없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말 발표한 2분기 성장률(전분기 대비)은 4.2%(연율)로 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월 대비)은 6년 만에 가장 높은 2.9%로 연준 목표치(2%)를 크게 웃돌았다. 지난달 실업률은 ‘완전고용’과 다름없는 수준인 3.9%였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미국 성장률을 2.9% 수준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는 연준이 추정하는 잠재성장률(1.8%)보다 1%포인트 이상 높을 뿐 아니라 독일(2.2%) 프랑스(1.8%) 일본(1.0%) 등 다른 선진국도 압도하는 수준이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주요 투자은행(IB)들은 미국이 3% 성장을 달성할 것이라며 보다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연준은 금리 인상의 고삐를 죄고 있다. 2015년 12월부터 7차례 기준금리를 올렸고, 올해 하반기에도 두 차례 추가 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려 시중에 풀었던 막대한 양의 자금(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이른바 ‘통화정책 정상화’를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양적완화(채권 매입을 통한 자금 공급)를 통해 공급한 자금은 4조 달러에 이른다. 미국을 넘어 전세계 자산가치를 끌어올린 성대한 ‘유동성 파티’를, 주최국 미국이 이제 끝내려 하는 것이다.
신흥국은 ‘머니 엑소더스’로 몸살
반면 신흥국은 미국 경제 회복의 반작용에 휘청대고 있다. 선진국들이 돈을 찍어대던 시기에 신흥국으로 몰려든 글로벌 투자자금이 기업 실적도 좋고 금리도 높아진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머니 엑소더스(투자자금 유출)’ 현상이 발생하면서 신흥국은 10년 만에 새로운 금융위기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장을 지낸 하태형 수원대 교수는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순간 전세계에서 달러가 빠져 나가 미국 금융시장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의 취약한 고리인 신흥국 경제부터 무너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터키 등 외채가 많은 신흥국의 충격이 두드러진다. 미국 달러화 가치 회복에 따라 이들 국가의 통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데다가 이러한 환율 변동이 외채 상환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경제적 취약성이 부각되고 있다. 신흥국 위기의 진앙으로 첫손에 꼽히는 터키는 통화(리라화) 가치가 올 들어 달러 대비 42% 폭락했다. 이에 터키 중앙은행은 13일 기준금리를 무려 6.25% 인상해 리라화 가치가 한때 5%이상 상승하기도 했다. 터키는 대외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54%인 데 반해 외환보유액은 GDP 대비 15%에 불과하다. 역시 외환보유액은 적고 외채는 GDP의 절반에 달하는 아르헨티나의 페소화와 브라질의 헤알화 역시 연초 대비 각각 50%, 22% 절하됐다. 아르헨티나는 자금 유출을 막고 금융 불안을 잠재우려 기준금리를 15%포인트(45→60%) 올렸지만 안정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6월 IMF에 손을 내민 상태다. 최성락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신흥국 금융불안이 장기화하면서 대외 지급 능력이 취약하고 정책 대응 여력이 제한적인 국가들을 중심으로 위험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며 남아공,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도 취약국으로 지목했다.
선진국-신흥국 자산가치도 엇갈려
미국과 신흥국의 양극화는 주식시장에서도 발견된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S&P500 지수는 올 들어 8.6% 올랐지만,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시장 지수는 1월 고점 대비 19.7% 하락했다. 통상 증시가 고점 대비 20% 떨어지면 약세장(베어마켓)으로 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신흥국 증시가 연이어 약세장에 진입하면서 위기 발생의 우려감을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외환과 주식을 거쳐 다른 자산시장에서도 신흥국의 부진이 확산된다면 일부 취약국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 위기 상황이 신흥국 전반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마이클 하트넷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수석투자전략가는 “지금 상황은 신흥국 통화 약세가 펀더멘털(기초체력)을 가리지 않고 확산됐던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시기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80ㆍ90년대 신흥국은 외화 확보를 주로 차입에 의존했지만 최근엔 주식ㆍ채권 시장을 통한 유입 자금의 비중이 높고 이런 자금은 시장 변동에 따라 일시에 빠져나갈 수 있다”며 “한 신흥국에 문제가 생기면 신흥국 전반에서 투자자금이 빠져나가 결국 신흥국 경기 전반이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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