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 내가 기꺼이 ‘내 자신’이라고 자부하고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여길만한 것은 무엇인가? 나의 배경, 학력, 지연 혹은 경제력인가? 나다운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온전히 나의 개성으로 만드는 절호의 시간이 ‘휴일’이다. 휴일은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소극적인 시간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수련하는 시간이다. 지난 추석동안 나에게 주어진 공휴일들을 어떻게 보내는지 관찰해 보았다. 과연 나는 이 소중한 시간을 가치 있게 보냈는가? 아니면 실망스럽게도 그럭저럭 빈둥거리며 우왕좌왕하며 흘려 보냈는가? 나는 SNS활동이나 포탈사이트를 좀처럼 서핑하지도 않는다. 나의 결심도 종종 허물어진다. 휴식 시간에 우연히 켠 TV가 나를 정신없게 만든다. 프로그램들은 대개 먹고 얻어먹고, 남을 흉내 내고 비난하고, 그저 웃고 떠들고 악어 눈물을 자아내는 자극적인 내용들이다.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미개한 수준이다. 그것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 내 자신에도 놀랐다. 이 프로그램들은 홈쇼핑 채널들로 포위되어있다. 신기한 물건들로 나의 눈을 유혹하여, 그 물건을 가져야 행복할 것은 착각을 일으킨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1767~1832)는 수요의 원천은 공급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대한민국의 홈쇼핑은 세의 경제 법칙의 완벽한 실험장이자 성공사례이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1883~1946)가 이 이념에 반격했다. 그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공공지출이 완전고용을 위한 해결책이며 과잉공급과 지출은 결국 개인과 기업, 더 나아가 국가를 빚더미와 파산으로 인도한다고 경고한다. 케인즈는 완전고용을 위해 저임금 노동자와 가계의 임금과 소득을 올려 소비를 증대시키고, 그 결과는 기업의 투자와 생산을 확대하는 구조인 ‘임금주도성장’을 주장하였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노동자 임금을 특히 강조한 케인즈의 ‘임금주도성장론’의 한국판이다.
인류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생존을 위해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노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제2차 산업혁명과 20세기 IT혁명은 인류에게 여가(餘暇)를 선사하였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생존이 아니라, 여가를 즐기기 위해 노동한다. 소위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일한다. 무엇이 ‘저녁이 있는 삶’인가? 내가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인 재화를 확보하여 여유를 가진다면, 나는 저녁에 무엇을 할 것인가? 여가를 동반한 새로운 자유는 우리에게 이전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가를 즐기려 하는가?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흉내 낸다. 그들은 매일 매일 수동적으로 게임, 휴대폰, 혹은 TV 채널을 통해 자극적인 장면에 탐닉한다. 혹은 친구들과 만나 한번 말하면 다시 기억할 수 없는 푸념, 잡담 혹은 남에 대한 험담으로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어제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열망이 없다. 어제까지 하던 말과 행동을 답습할 뿐이다.
우리는 한가한 일로 여가를 낭비한다. 여가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잠재력을 탐색하여 나를 나답게 만드는 개성으로 변모 가능한 물건이다. 자부심은 자신에게 그런 잠재력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잠재력을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탁월함으로 만들려는 마음가짐이다. 미국 철학자 리차드 테일러는 ‘자부심 회복’이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의 능력이 평등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지만, 한 개인은 다른 개인보다, 자신이 몰입한 분야에서 탁월하다. 이 탁월함은 계급, 권력, 혹은 부와는 상관이 없다. 자신만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창조하려는 노력은 숭고하다. 왜냐하면 그 노력은 그 사람에게 자부심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특정한 분야에서 최선을 발휘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탁월함을 그리스어로 ‘아레테(arête)’라고 불렀다. 굴뚝은 굴뚝으로 ‘아레테’가 있고 황소는 황소로 ‘아레테’가 있다. 아레테란 자신만이 성취할 수 있는 고유한 분야가 있고,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기 위한 수련이다. 자부심(自負心)이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을 ‘패(貝)’를 찾아 기꺼이 짊어지고 자신이 되고 싶은 미래의 자신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려는 용기다.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저녁’있는 삶에 TV앞에 앉아 패널들의 수준에 맞추어 수동적인 좀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패’를 찾기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나만의 노래’를 들을 것인가? 나는 현란한 물건에 현혹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변치 않을 나만의 보물을 발굴하여 갈고 닦아 찬란한 빛을 낼 것인가? 나는 나 자신에 관해 자부심을 느끼는가? 내가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타인이 나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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