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주리의 '달려라, 꼬마'
그야말로 더없이 진부한 클리셰이지만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데 동의한다. 출발점과 결승점이 있을 뿐, 공식 코스도 없는 길을 우리 모두 쉼 없이 달리고 달린다. 아직 자기 속도며 보폭을 가늠하지 못하는 어린 마라토너에게는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코스를 감내하는 일부터가 벅찰 것이다. 얼마나 달려야 하는지, 언제 목적지에 이르는지를 계산하자면 이 마라톤이 더욱 막막해진다는 것을 알 리 없다. 달리는 일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대체로 철들어 세상 떠날 때 깨닫는 잠언인 것이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길에 쓰러지거나 스러지는 어린 마라토너가 있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 정부 관계자가 답한다는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 청원 게시판에는 지금 또 한 사람 어린 마라토너가 무참하게 스러진 비극에 걸음을 멈추고 발이나마 동동 구르는 심정들이 모여 있다.
터널 속으로 길게 뻗은 철로를 밟으며 엉거주춤 달리고 있는 작은 곰 마라토너! ‘달려라, 꼬마’ 표지 그림에 눈길이 닿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어린 곰은 또 어쩌다 혼자가 되었을까.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걸까. 누군가 해치려는 이가 뒤쫓고 있는 걸까. 어둑한 터널 저편 출구가 새벽빛으로 환해서 마음이 놓이기도 하지만, 과연 저 짧은 다리며 작은 발이 내딛는 겨우 한 뼘이 될까 말까 한 보폭으로 추격자를 따돌릴 수 있을까.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작은 곰의 질주가 보람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표지를 연다. 면지와 속표지를 이어가며 꼬마 곰이 달리게 된 전사(前事)가 펼쳐진다. 동물원 철창 우리 안에서 보름달을 올려다보던 작은 곰 ‘꼬마’는 그 노랗고 둥근 기운을 타고 담장을 넘었다.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지금 막 터널도 지나게 된 것이다.
두려움과 고단함을 무릅쓰고 꼬마는 계속 달린다. 자기 같은 어린 존재들의 응원을 받으며 놀이터를 지나고 시장 통을 지나고 주택가를 벗어나 숲에 이르지만, 오래 머물 곳이 아니다. 배고픔도 참고 잠시 눈을 붙이는 참인데 추격자들에게 쫓겨 다시 달린다. 강을 건너고 망망대해를 건넌다. 마침내 이른 꼬마의 나라에는 자연 그대로 온전한 나무며 풀이며 꽃이 자라고 물이 흐르고 무지개가 떠있다.
달려라, 꼬마
신경림 글∙주리 그림
풀과바람 발행∙40쪽∙1만1,000원
‘달려라, 꼬마’는 신경림 시인이 2010년 과천 서울대공원 우리를 빠져 나와 청계산으로 달아나서는 8박 9일을 헤매다 구조된 용감무쌍 천진난만 여섯 살배기 말레이곰(태양곰)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쓴 시이다. 실화도 감동적이지만, 실제 결말을 뛰어넘어 ‘꼬마’가 계속 달리기를, 그래서 진정한 삶터에 이르기를 바라는 노시인의 노래는 한 어린 존재가 자유와 근원을 찾아 내달린 모험에 대한 속 깊은 응원가이다. 어린 곰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갇힌 자와 어린 자의 용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격려한다.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서//개울을 철벙철벙 건너서//달려라 꼬마,/숲을 향해서/철길도 고속도로도 두려워 말고//운동장도//장마당도 가로질러서//달려라 꼬마,/용감한 아기 곰아//잔소리도 없고/구경꾼도 없는 땅을 찾아서//달려라 꼬마,/먼 남쪽 나라에서 온 아기 곰아//배고파도 참고//힘들어도 견디면서//네 고향 정글 같은/크고 깊은 숲 나올 때까지//달려라 꼬마,/나도 함께 달리고 싶은 아기 곰아//’
원작 시와 행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시그림책 만들기는 고난도 작업이다. 공광규의 시 ‘흰 눈’, 김용택의 시 ‘할머니 집에 가는 길’, 이정록의 시 ‘달팽이 학교’, 문정희의 시 ‘한계령’을 그림으로 풀어내면서 다양한 해석과 연출을 실험하며 내공을 쌓아온 작가 주리는 이 그림책에서 과감한 솜씨를 보여준다. 시가 품고 있는 드라마틱한 배경 이야기를 버리지 않은 채 실제로는 좀 기괴하게 생긴 말레이곰을 곰돌이 푸 스타일의 캐릭터로 잡고, 주인공이 달리는 동선을 따라 바뀌는 배경 시간과 공간을 서슴없이 펼쳐 보인다. 그렇게 어른다운 어른이 불러주는 응원가가 절제된 화면으로 고즈넉이 구현된 이 그림책을 들여다보자면, 마라톤 걸음을 늦추고 쓰러진 자를 돌아보거나 돌볼 엄두가 난다. 스스로 어설프고 고달픈 마라토너이지만 힘내라고 어깨 두드려줄 용기가 생긴다.
이상희 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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