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국가들이 머지않아 도래할 ‘마이카 시대’를 앞두고 ‘국민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높은 경제성장과 함께 커지고 있는 자국 자동차 시장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에만 맡겨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용창출은 물론 자동차 산업을 통해 철강 등 첨단 소재산업과 각종 부품산업도 끌어 올리고, 정비, 판매, 할부금융, 보험 등 광범한 분야의 발전 견인차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자동차산업ㆍ시장 급성장
31일 아세안 자동차연맹(AFF)에 따르면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자동차 시장 규모는 지난해 333만9,693대로 전년 대비 5%가량 성장했다. 생산 대수의 경우 지난해 404만7,196대로 전년(402만)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지만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288만대를 생산, 전년 동기 대비 8% 성장하는 등 본격적인 성장단계에 진입했다.
베트남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올해 역내 상품관세 철폐로 부품을 보다 저렴하고 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이에 따라 생산과 판매도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관련 업계는 올해 아세안 지역 내 완성차 생산규모가 역대 최고인 2013년(440만대)에 근접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212만대를 생산한 2009년보다 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아세안 자동차산업 팽창기에 가장 돋보이는 곳은 베트남이고, 그 주인공은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최대 민간기업 빈그룹(VinGroup)이다. 지난해 9월 베트남 국민차 ‘빈패스트(VINFAST)’ 출범 선언 뒤 1년여 만인 최근 ‘2018 파리모터쇼’에서 실물 모델까지 공개했다. 업계 관계자는 “계획 발표 1년 만에 공장도 거의 다 짓고, 모터쇼까지 참가한 것은 대단한 추진력”이라고 평가했다. 빈패스트는 현재 내년 3분기 양산을 목표로 세계 각국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분주하게 접촉하고 있다.
베트남의 현지 매체의 한 자동차담당 기자는 “정부는 최근 2020년 F1 자동차대회 개최 계약을 체결했다”며 “자동차 생산국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대회 장소로는 수도 하노이가 거론된다. 2020년은 베트남이 아세안의 의장국을 맡는 해로, 자국 생산 자동차를 필두고 급성장한 베트남의 힘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래차산업 허브, 꿈 말레이시아
시장 규모 60만대 수준의 말레이시아도 국민차 개발을 준비 중이다. 지난 5월 61년만의 정권 교체를 통해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른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가 새로운 국민차의 필요성을 제기한 뒤 ‘제3의 국민차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고 있다. 대럴 레이킹 통상산업부(MITI) 장관은 “아세안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의 여파로부터 피하기 위해 결속해야 하고,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부품을 이용한 국민차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며 “제3의 국민차는 기존 국민차와 경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내 무관세 교역을 바탕으로 첨단차 산업 생태계를 조성, 미래 자동차 산업의 허브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선거에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새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는 상당하다. 이미 실패 사례가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시도하는 건 무모할 뿐만 아니라 재정 부족을 호소하는 정부의 사업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방송가에서 활약하고 있는 현지 소식통은 “아주 많은 사람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말레이시아가 단순 소비만 하는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자동차산업이 필요하다는 총리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는 1980년대 마하티르 집권 1기 시절 자동차 업체 프로톤을 창업했고, 1990년대에는 두 번째 국민차 페로두아를 출범시켰다. 페로두아는 한때 국내 시장 점유율을 36%까지 끌어올리며 명실상부한 국민차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친 자국 차 산업 보호 정책에 기댄 나머지 단순조립 수준의 업체로 남아 있다. 프로톤은 품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적자로 고전하다 최근 중국 업체 리지에 지분 절반이 넘어간 상황이다.
주 말레이시아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제3 국민차 프로젝트는 차세대 자동차에 방점이 찍혀 있다. 향후 기차, 항공기 등 첨단 기계산업까지도 연관돼 있다”며 “경제성장의 추동력을 갖고 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선 한국서 배우자, 인도네시아
아세안 역내 차량 생산과 판매에서 3분의1의 비중을 차지하는 인도네시아도 자국 자동차 브랜드가 없다. 20여년 전 한국의 기아자동차를 통해 국민차 개발을 시도했지만, 정권 교체와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여파로 중단됐다. 하지만 최근 한국 정부의 ‘신남방 정책’ 등으로 무르익은 분위기에 힘입어 현대자동차와의 협업 움직임이 가시화 하고 있다. 지난 8월 양국의 자동차 분야 경제협력 논의와 9월 양국 정상회담 등을 통해 충분히 조율됐으며 사실상 발표만 남겨 놓고 있는 상황이다. 현지 소식통은 “현대차와 그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인도네시아에 엄청나게 오가고 있다”며 “현대차로부터 주문을 받은 업체도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업계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시장을 점하고 있는 일본 업체 견제를 위해 한국의 현대와 손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자동차의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은 98% 수준이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그림 4지난 26일 ‘베트남 모터쇼 2018’이 열린 베트남 호찌민 사이공전시컨벤션센터(SECC) 옆에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전시 공간에 한 시중 은행이 자리를 잡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자동차 할부 구매를 지원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여느 모터쇼 행사장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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