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용준 장편소설 ‘프롬 토니오’
온전히 해명되거나 규정되지 못한 일들. 인간의 인지나 논리로는 채 가 닿지 못해 비의(秘義)이거나 비의(悲意)로 남아야 하는 것들. 이 깊고 어두운 틈, 저 멀고 아득한 간격. 정용준의 ‘프롬 토니오’는 우리가 어떻게 이 틈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아울러 소설적 이야기가 어떻게 이 간격을 좁힐 수 있는지에 대해 아프고도 아름답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사람을 잃었다. 화산학자 시몬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연인 앨런을 잃었고 지진학자 데쓰로는 아버지와 여동생과 조카를 한번에 잃었다. 인간과 영혼의 경계에 있는 토니오 역시 죽음으로 인해 생텍쥐페리라 불렸던 자신의 이름과 육체와 사랑하는 부인까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렇기에 죽음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하느냐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생각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시몬에게 죽음이란 오염이나 부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현실적 삶을 끊임없이 희생시키는 방법을 통해 잠수통을 메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은 연인 앨런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데쓰로는 큰 지진으로 가족들을 떠나 보낸 이후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결론지었던 지진 예측에 대한 무모한 연구를 다시 시작한다. 토니오는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유토와 우토라는 다른 차원의 세계까지 모두 횡단한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토니오에게 어떤 초월의 능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토니오는 비밀스럽게 연결된 시공간의 통로를 허정허정 지나왔을 뿐이다. 만약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프롬 토니오’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어떤 현상에 대한 정서적 이해에 있다. 지구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고래가 어떻게 수압을 견디며 수심 2,000m가 넘는 심해까지 이동하는지, 혹은 전투기를 몰다 사라진 생텍쥐페리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면 나는 지금껏 알려진 정보가 아니라 이 작품에 늘어진 이야기들로 답을 떠올릴 것이다. 이 답은 실제적 사실과는 다소 멀 수 있으나 삶의 진실에는 더 가까울 것이기에. 아울러 눈을 감고 현시되는 것들만을 좇는 일이 얼마나 빈약하고 남루한 것인지도 의심해볼 것이다. 이왕 눈을 감은 김에 눈에 안 보이는 사람을 떠올려보아도 좋겠다. 잊지 않으면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을 뜨면 당신이 돌아올 것 같아. 어쩌면 하얗게 수염을 기르고 절룩거리면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눈에 당신의 그 모습은 여전히 멋져 보일 거야. 한겨울 눈 덮인 나무처럼 잘생긴 당신. 나는 불안하고 아파. 당신과 나, 우리 사이의 이 빈 공간, 까마득한 심연이 너무도 끔찍해. …날 꽉 잡고 있어 줘서 고마워. 당신이 내게 했던 말.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당신을 잃으면 난 그냥 죽어버릴 거야.”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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