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로 전철이 지나는 지하도에 가수 새미가 있었다. 가수는 남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다. 새미는 누굴 위해 노래했나? 일터를 오가는 노동자들, 거리의 아이들, 강아지와 고양이... 새미는 '길거리 가수'였다. 등에 큰북을 메고 양손에 아코디언, 무릎 사이엔 심벌즈를 매단 채 신나게 연주하고 흥겹게 노래하는. 노래는 가슴에 차오른 감정을 음성을 통해 선율로 표현하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가슴에 공명하는 것. 노래에 공명한 사람들은 기꺼이 동전을 던져주었고 새미는 그것으로 생계를 해결하며 흥겨운 길거리 공연을 이어갔다.
공연은 흥행사가 등장하면서 중단되었다. 한 서커스단장이 새미를 '픽업'한 것이다. 길거리 가수라고 인기를 얻는 꿈이 없었으랴. 관객과 박수소리를 사랑한 새미는 서커스무대에서도 흥겹게 노래했다. 그러나 단장은 재능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관객을 웃기고 싶었고, 새미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실망한 새미에게 더 큰 흥행사가 다가왔다. "나한테 맡겨 봐. 진짜 가수로 만들어 줄테니." 그는 정말 능력 있는 자였다. 새미는 곧 중앙무대에 섰고 체육관 공연에서도 잘나갔으며 텔레비전 화면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기의 비결은 새미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흥행자본이 연출한 현란하고 섹시한 비주얼과 가수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사운드였으며, 황색언론이 추어주는 연예기사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신기루 같은 ‘연예상품’의 유효기간이 지나면 곧장 다른 물건으로 옮겨갈 것들이었다.
길거리 가수 새미
찰스 키핑 지음∙서애경 옮김
사계절 발행∙32쪽∙1만1,500원
얼마 뒤 새미의 자리는 새 상품으로 채워졌고, 새미는 손바닥만 한 비디오테이프 속에 남아 대중으로부터 잊혀 갔다. 재기를 꿈꾼 새미는 짧지만 강렬한 인기가 안겨준 집과 재산을 털어 자신이 등장하는 스펙터클 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새미는 영화가 아니라 노래를 하는 사람. 영화는 망하고 새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남은 것은 예전의 '길거리 악기'뿐.
새미는 비 내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다 문득 길거리의 옛 친구들이 함께 비를 맞으며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변함없는 길거리 가수라는 걸. 새미는 악기를 둘러메고 지하도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공연장의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거리의 친구들을 위한 노래를 하며 행복을 느꼈다.
20세기를 살다 간 영국의 작가가 35년 전에 만든 이 그림책이 오늘날 이 땅에서도 남들의 흘러간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천재성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예술가들의 꿈과 그 꿈을 이용해 부를 창출하는 스타시스템의 원리가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여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이리라. 더불어, 작고 낮은 이들과 공명하여 위안과 희망의 빛을 자아내는 대중예술의 본질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리라. 빛을 얻은 대가로 사람들은 거리의 음악가에게 동전-저작권료를 건네주고, 음악가들은 그것을 양식 삼아 거리의 공연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야만의 시절부터 촛불광장까지, 작고 낮은 사람들과 공명하는 수많은 노래들을 만들어온 두 음악가가 있다. 김호철과 윤민석. 자본과 권력의 찬 그늘 속에서 빛을 찾던 이들이라면 이들의 노래에 신세지지 않은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번도 음악으로 돈 벌 궁리를 하지 않고 살아온 이들의 삶이 지금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물신의 시대에 물신을 거부하며 살아온 까닭이다. 이들의 삶을 존경하는 후배들이 지금 김호철의 음악을 모아 음반을 만들고 있다.
이 그림책은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새미는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삶에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진짜 가수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만약 여러분도 새미를 만난다면 동전 한 닢 주고, 함께 춤추고 노래해 보세요." 이 땅의 지하도를 지나며 '새미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노래에서 위안과 희망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김호철의 음반 한 장 구입하길 권한다. 음반 값에 거리의 음악가에게 건네는 동전 한 닢이 들어있다.
김장성 그림책 작가∙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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