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법자 →소수자’, ‘비양심→양심’으로 바뀌어온 ‘양심적 병역거부’ 법원 판결사
※ [모슈]는 ‘모아보는 이슈’의 준말로, 한국일보가 화제가 된 뉴스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기사입니다.
“범법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는 게 말이나 되냐?”
2002년 3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와 인권’ 토론회장에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국내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공개 선언한 오태양씨를 둘러싸고 찬반 토론이 벌어진 자리였습니다. 불교신자이자 시민단체활동가인 그는 2001년 12월 입영을 거부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날 오씨가 발언을 하려고 하자 재향군인회 소속 남성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그는 결국 마이크를 내려 놓았습니다. 박상원 병무청 감사담당관은 오씨를 향해 “더 이상 군대 연기가 안 되니까 결국 기피를 선택한 비양심적 인물”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달 1일, 종교 또는 신념을 이유로 입영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무죄”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입영을 거부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오모씨 상고심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창원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 판결이 나온 이후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남성 홍모씨에게도 하급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법원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현역 입영 거부뿐 아니라 예비군 훈련 거부도 허용한 셈입니다. 앞서 대법원은 병역 의무를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에 대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범법자’가 ‘소수자’가 되기까지, ‘비양심’이 ‘양심’이 되기까지,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 2004년엔 유죄, 2018년엔 무죄
2004년 7월 15일 오후 2시, 미디어의 관심은 대법정에 쏠렸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입영을 거부해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된 최모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이날 선고에 따라 전국 각 법원에서 진행 중인 양심적 병역거부 300여건의 향방도 결정될 운명이었습니다.
당시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 중 대법원이 택한 것은 국방의 의무였습니다. 대법관 13명이 모두 참여한 전원합의체는 이날 최씨에 대해 징역 1년 6월을 확정했습니다. 판결문에선 “종교적 양심 실현의 자유도 국가의 안전이 보장된 다음에야 가능한 상대적 자유”라며 “남북이 분단돼 대치하고 있는 현실적 안보 상황을 고려할 때 국방의 의무가 보다 강조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14년 뒤, 이날의 유죄는 무죄가 됐습니다. 대법원은 ‘분단의 위기’를 강조하는 대신 양심의 ‘진정성’을 따졌습니다. 오씨가 2003년 처음 입영통지를 받은 이래 현재까지 신앙을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것, 아버지와 동생도 같은 이유로 옥살이를 한 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도 형사처벌 받을 위험을 감수한 점 등을 “양심과 신념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 “담당 판사 대노하다” 최초의 무죄판결은 언제?
오태양씨로 인해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지만 그가 최초의 인물은 아닙니다. 오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한 2001년까지, 비공개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의 수는 1,594명에 이르렀습니다.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일제 강점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9년 일본은 조선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을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로 체포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법적 규제가 본격화됐습니다. 1959년 모 일간지 4월 30일자에 실린 ‘담당 판사 대노(大怒)하다’란 기사에는 징집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게 담당판사가 검사 구형의 2배인 징역 2년을 언도했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장준택 당시 부장판사는 “신성한 국토방위의 의무를 고의적으로 기피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빙자하여 국가와 정부까지도 살인단체로 규정 짓는 결과와 똑같은 것”이라며 “검사가 구형한 징역 1년은 너무나 형이 가벼운 바 있으며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광신자에게 충분한 반성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에서 병역거부는 어떤 범죄보다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병역기피자가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다수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군부대에서 구타 당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최초로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은 세기가 바뀐 2002년 5월입니다. 무죄 판결한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렬 판사는 인터뷰에서 “국가를 위해 개인은 무조건적으로 희생해야 한다면 헌법은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2004년 2건, 2007년 1건, 2015년 6건으로 조금씩 늘어난 무죄판결은 2017년 35건에 달했습니다.
◇ 비양심적 병역거부도 있나? 양심의 뜻
대법원 판결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새로운 논의의 물꼬가 트이면서 ‘양심’이란 단어가 다시 도마에 올랐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무죄라면 병역 의무를 받아들인 사람은 ‘비양심적’ 행위를 한 것이냐는 항의가 나올 법 합니다. 그러나 법률적 의미의 ‘양심’과 사전적 의미의 ‘양심’은 뜻이 조금 다릅니다.
오모씨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대법관들은 '양심'에 대해 "일상에서 쓰이는 착한 마음이나 올바른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법률적 의미에서는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이라 함은 그 신념에 따른 행동이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것을 포함합니다.
최근 판결로 대체복무제 마련 등 당면 과제는 늘었지만, 국가가 국민의 ‘양심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지에 관해 다시금 질문하게 만든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합니다. 대법관들에 따르면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자 민주주의 존립의 불가결한 전제”입니다. 나의 양심과 국가의 양심이 다를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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