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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떼창 그리고 ‘따로 또 같이’의 삶

입력
2018.12.04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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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장안의 화제다. 예상을 깨고 롱런을 하고 있다. 지난 주말을 거치면서는 600만 관중을 동원, ‘레미제라블’(2012년)이 갖고 있던 음악영화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넘어섰고, 올해 4대 흥행작으로 발돋움했다.

흥행 원인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그룹 퀸(Queen)에 대한 40, 50대의 향수와 10, 20대에도 먹히는 그들의 음악,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열정과 자유로운 실험에 대한 환호, 엄청난 인기와 성공에도 가시지 않는 고독에 망가지고 거듭되는 성적, 인종적 편견에 시달리는 모습에 대한 감정이입 등, 다양한 측면에서 대박 요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꼽힌 것이 ‘떼창(sing along)’이다. ABC 같은 미국의 유수 언론이 보도했을 정도로 떼창은, 이 영화가 우리나라서 400억 원이 넘는 수익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물론 이 영화가 상영되는 모든 영화관에서 떼창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목청껏 떼창을 부를 수 있는 상영관은 오히려 소수다. 그럼에도 떼창 덕분에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국에서 흥행했다는 분석이 나온 까닭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서 연출된 떼창의 대서사에 매료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떼창은 합창과는 다르다. 합창은 함께 울리는 목소리 사이의 조화를 추구한다. 하여 함께 부르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맞춰서 내 목소리를 조절함이 기본으로 요구된다. 내가 아무리 잘 불러도 그 조화를 깨면 합창자로서는 적당치 않게 된다. 합창은 말 그대로 ‘다 같이 함께’ 부르기이기 때문이다. 합창을 통해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는 유의 말이 나온 까닭이다. 반면 떼창은 함께 부르고 있지만 남의 목소리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뿐 아니라 옆 사람이, 아니 함께 부르는 모든 이가 경쟁하듯 음 이탈을 반복해도 떼창이 깨지진 않는다. 함께 부르고 있지만 자기 목소리에만 충실해도 무방하다. 예컨대 성가대의 합창은 부조화가 문제되지만, 신도들의 떼창은 그렇지 않은 이유다.

중요한 건 목소리의 조화가 아니라 떼를 지어 노래하는데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다. 이러한 의미에서 떼창은 ‘따로 또 같이’ 부르기다. 따로 부름과 같이 부름이 동시에 구현된다는 얘기다. 따로 부름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협화음은 같이 부름으로써 생기는 효과로 상쇄되곤 한다. 떼창이 유발하는, 이를테면 찬송가를 성가대의 합창으로 들을 때엔 경험하지 못하지만, 신도들과 더불어 부를 때엔 경험케 되는 그런 효과 말이다. 그건 신앙심이나 이념 등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체감일 수도 있고, 우정이나 동질감 등의 형성으로 인한 충족감이나 안도감일 수도 있다. 따로 또 같이 노래 부르는 그 순간에만 집중함으로써 경험케 되는 몰아(沒我)의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다. 덕분에 목소리는 ‘따로 또 같이’ 내지만 부르는 이들은 ‘다 같이 함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떼창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필자가 경험했던 떼창이 주로 이러했기에 한 말이다. 70, 80년대 대학에 입학한 세대는 주점에서 탁자를 두드리며 이른바 ‘운동가요’로 목 놓아 떼창을 부르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선창은 곧잘 떼창으로 바뀌었고, 더불어 부르는 노래로 불의한 시대가 야기한 분노와 울분을 삭이곤 했다. 음치라도 또 박치라도 별 상관없었다. 첫 소절만 부르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떼창으로 이어졌다. 목소리들의 부조화도 거의 문제되지 않았다. 노래 소리는 따로 또 같이 울려 퍼졌지만 부르는 이들은 그렇게 다 같이 함께가 되어 어두운 시대를 더불어 건너갔다.

그러나 지금의 떼창은 그때와는 다른 듯하다. 사람들은 노래만 따로 또 같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떼창의 순간에도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듯싶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떼창이 혼술, 혼밥 같은 말로 대변되는 ‘나홀로족’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딱 맞는 형식처럼 보였다. 내가 속한 집단 전체 차원서는 공정하지 못해도, 나에겐 공정하다면 굳이 문제 삼지 않는 풍조와도 잘 어울릴 법했다. 분명 사회 풍조와 기술의 진전 등으로 홀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한층 용이해졌다. 그렇다고 하여 함께 살지 않으면 휩싸이게 되는 존재론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따로 또 같이라는 삶의 방식은 이러한 딜레마적 현실에 자못 유용한 듯싶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두 번째 볼 때였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다시 봐도 벅찬 감격을 안겨줬다. 퀸의 공연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밝혀졌다. 나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순간 이태 전 아일랜드서 접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찾았던 시내의 펍(pub)은 젊은이, 중년, 노년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저마다 생맥주를 든 채 펍 한켠서 연주되는 노래를 흥겹게 함께 부르고 있었다. 펍은 술집 특유의 왁자한 기운에다 목청껏 불러대는 떼창으로 생기가 빼곡했다.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이 일상이었던 셈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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