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죽음 준비하는 동물들은 많다. 하지만 인간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순간이었다고 깨닫고 후회하는 동물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그저 동물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장소에 몰입하려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 신적인 인간이다. 그(녀)는 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려한다. 우주의 운행원칙인 시간은 재현될 수 없다.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시간이라는 원칙 안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산, 호수, 나무, 새, 진돗개, 그리고 책상, 컴퓨터, 램프, 만년필 등등 내가 매일 보는 것들은 항상 ‘지금’을 산다. 동식물은 물론 사물조차, 자신의 현재를 만끽하고 몰입하여, 후회하는 법이 없다. 이것들은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듯이, 그 순간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름답고 유용하고 애절하다.
인간은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애써 잊으려 시도한다. 문명은 시간을 멈추려는 반역이며 문화는 시간을 거슬리려는 몸짓이다. 인간은 영원히 어린 아이상태로 남고 싶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브 융은 인간 마음속에 깊이 존재하여 그의 삶을 조절하는 원시적이며 구조적인 인간심리의 원형을 ‘푸에르 아이테르누스(puer aeternus)’라고 불렀다. 이 라틴어 용어를 번역하자면 ‘영원한 소년’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혼돈에 질서, 조절, 이성, 그리고 책임이라는 가치를 부여한 신은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흐름인 ‘늙음’이 자연스런 삶의 질서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시간을 방해하여 태초의 시간으로 인간을 돌려보내는 혼돈과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신을 창안했다. 디오니소스는 본능, 무질서, 혼돈, 그리고 엑스타시를 권장한다. 인류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는 영원히 젊어지고 싶어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웅 길가메시 이야기다. 그는 ‘영원한 소년’이다. 이 서사시는 현대소비문명의 기저에 깔려있는 피터팬 증후군의 원형이다.
인간은 피터 팬 증후군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신속하게 도망쳐버리는 시간을 직시함으로 ‘지금과 여기’를 자신의 삶이란 위대한 건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벽돌로 전환할 수 있다. ‘지금과 여기’에 몰입하기 위해 정복해야할 대상은 행운이 아니라 내 자신이다.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어제까지의 삶의 경험으로 내 머릿속에 안주하여 나를 조절하고 깨달음을 방해하는 번뇌(煩惱)다. 우리는 종종 삶의 어려움에 봉착할 때, 손을 외부에 벌리고 눈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우리의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불안과 불만을 타인 혹은 공동체에서 발굴하려 애쓴다. 우리가 경험한 전쟁, 유신, 그리고 독재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심화하였다. 그러나 환경이 나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일 리가 없다.
노예로 살다가 로마시대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스스로 얽맨 남을 탓하는 습관적인 생각으로부터 탈출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온전하고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삶은 두 종류다. 하나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지위와 같은 외적인 가치를 남들과 경쟁하는 삶이다. 다른 삶은 자신에게 감동적인 삶을 발견하여 그것을 갈고 닦는 완벽을 지향하는 예술적인 삶이다. 그는 철학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연마하였다. 그의 ‘인생수첩’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절 할 수 있는 것엔 (깊은 사고를 통한) 의견, (충동을 통한) 선택, (무엇을 얻고자하는) 욕망, (무엇을 피하고자하는) 회피,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엔, 육체의 늙음, 재산증식, 명성획득, 그리고 고위직입니다... 전자는 자유롭고, 거침이 없고,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누군가에 매여 있고, 타인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다른 사람에 의지합니다.” 만일 내가 조절할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것들을 통해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는 어리석다. 부와 권력을 배분하는 운명의 여신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물레를 쉬지 않고 돌려 다른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 정복(征服)이란 아무 생각도 없이 타인의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자신을 보고 멈추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변화하여 사시시철 시시각각 혁신하는 달처럼,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에게 승복하는 내적이며 사적인 용기다. 내가 오늘 정복할 대상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여기에서 내 생각을 정복하고 있는가? 내 마음 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생각조차 감지하여 그것을 아득히 보이는 목적지로 가기위한 내 손의 등불로 삼고 조용히 걷고 싶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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