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 시대의 한류] <2> 중국 – 일방적 한류에서 공존 흐름으로
시진핑 “특색문화 진흥” 5년 예산 164조원이나 책정하며 공들여
“우월적으로 전파하던 시대 끝나… 한중 상호 공감할 新한류 모색을”
“재작년에는 촬영을 금지 당했는데 이번에는 경고만 받았습니다. 예정보다 좀 늦어졌지만 그래도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지 않아 천만다행이죠. 확실히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3일 중국 베이징(北京) 중심가 한 카페에서 만난 황모(47) 촬영감독. 한국에서 15년간 일하다가 2105년 중국의 한류 드라마 붐을 겨냥해 후배 4명과 베이징에 본부를 둔 중국 기획사로 옮겨왔다. 두둑한 연봉과 작품이 흥행에 성공할 경우 막대한 인센티브도 약속 받았다.
그러나 곧 시련이 시작됐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한파였다. 막무가내 압박으로 2017년 악몽의 해가 됐다. 작품 섭외는 물론이고 겨우 제작에 돌입해도 계속 문제가 터졌다. 하이난(海南)성 싼야(三亞)에서 촬영 때는 갑자기 공안이 들이닥쳐 팀원들과 함께 황 감독을 현장에서 쫓겨냈다. 금전적 손실이 막대했다. 황 감독은 “그나마 최근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두 달 전 상하이(上海) 촬영에서도 공안 호출을 받았지만, 비자만 점검하더니 ‘문제 생기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중국의 패션 한류도 겨우 살아나고 있다. 베이징 시내 한 고급 미용실에서 7년째 일하는 천모(41) 헤어디자이너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사드 갈등으로 단골 손님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는데 정말 미치겠더라.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초년병 시절 각오로 빗자루 들고 바닥청소까지 감수하며 악물고 버텼다”고 말했다. 다행히 2017년말 문재인 대통령 방중을 계기로 상황이 나아져 이제는 단골 손님들도 거의 회복됐다.
1세대 한류 열풍 중심지였던 중국이 2017년 한국에 가한 이른바 ‘한한령’(限韓令) 충격이 한류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 내고 있다. 한류가 중국 편향에서 벗어나 인류의 보편정서에 호소하는 단계로 발전하는 데 한한령이 큰 자극을 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드 이전 한류는 중국 대중문화의 주류나 마찬가지였다. TV에선 밤낮 가리지 않고 한국 드라마가 방영됐고, 음악 프로그램이나 음원 다운로드 챠트에선 한국 노래가 상위권을 휩쓸었다. 젊은 층이 선호하는 선물은 한국 화장품과 액세서리였고, 대형 미용실이나 성형외과는 한국인 디자이너와 의사 모시기 경쟁을 벌였다. 중국 기획사들이 작품을 만들 때면 촬영ㆍ조명ㆍ의상ㆍ메이크업 등 핵심 인력의 상당수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해마다 급증했고 서울 명동과 제주 등지는 흡사 차이나타운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덩달아 중국에서 삼성 스마트폰이 불티나게 팔렸고 한국 식당들도 호황을 누렸다. 중견기업들도 매년 주재원을 늘리며 사업을 확장해갔다. 하지만 사드 갈등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정치ㆍ외교적 갈등이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문화분야에 어떻게 투영되는지가 확인됐다. 앞서 소개된 황 감독과 천 헤어디자이너 등 무수한 중국 진출 한국인들이 피해를 봤다.
다행히 지난해부터는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 당장 규제 강도가 약해졌다. 웨이보(微博)를 비롯한 중국 소셜미디어에선 한류 관련 소식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송 중인 박보검ㆍ송혜교 주연 드라마 ‘남자친구’는 7일 현재 웨이보에서 해시태그 수가 6억2,000만뷰를 넘어섰을 정도다. 물론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이 드라마가 방영되진 않지만 당국은 편법 통로를 막지 않고 있다. 새해 첫 날 중국 CCTV가 지난해 세계 뉴스를 결산하면서 ‘방탄소년단 신드롬’을 2분 가까이 다룬 것도 상징적이다.
음원시장은 사실상 다시 개방됐고 중국 드라마ㆍ영화 촬영에 합류하는 한국인 스태프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영화 ‘베테랑’의 중국판 버전도 우여곡절 끝에 조만간 상영관에 걸릴 예정이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2017년 중단됐던 한중 우호주간 행사를 지난해 재개됐고, 한국문화원도 윈난(雲南)성 리장(麗江)과 간쑤(甘肅)성 둔황(敦煌) 등지에서 문화교류 사업을 진행했다. 2017년 한국 영화를 단 한편도 초청하지 않았던 베이징국제영화제는 지난해에 7편을 초청했고, 꽉 막혔던 한국행 단체관광도 베이징ㆍ상하이ㆍ산둥(山東)성 등 6개 지역에선 숨통이 트였다.
불안한 여건 속에서 중국에서 새로운 한류에 도전하는 이들은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바로 중화문화와 공존하는 한류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지도부가 ‘중국 특색’ 문화산업 진흥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해 초 5개년 문화산업 진흥책을 내놓으면서 무려 1조위안(약 164조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문화 관련 정책을 총괄하게 되면서 국가 차원의 개입 범위와 가능성도 훨씬 커졌다. 중국 정부가 한류에 대한 규제를 점차 완화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중장기 문화산업정책에 기반해 속도와 범위를 제한하고 조절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중국 게임당국은 최근 판호(게임 영업 허가) 발급을 9개월만에 재개하면서 온라인 게임마저 ‘사상ㆍ문화의 중요한 진지’라고 규정했다. 중국 3대 방송ㆍ연예ㆍ예술분야 전문대학 중 하나인 상하이희극학원 유학생 박희원(23)씨는 “작년부터 중국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중국 특색 문화산업 발전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는 내용이 커리큘럼에 포함됐다”면서 “중국인 학생들은 별 거부감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우월적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한국문화를 전파했던 한류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한국문화원 관계자는 “중국 경제 발전과 문화산업 진흥책을 감안하면 중국이 한류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고 따라갈 거라 생각하는 건 무리”라며 “여전히 매력적인 중국 시장에 도전하되 중국의 전통문화와 체제의 특수성, 문화산업 정책 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양국 국민이 서로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하는 한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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